이 책은 정말 한 시간 정도만에도 후루룩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렇다고 내용이 가볍지는 않다. 같은 내용을 전달하고 싶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그 내용이 어떻게, 어떤 느낌으로 전달되는지에 따라서 같은 내용도 천차만별로 차이가 난다. 이 책에서는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말을 표현하는 법. 진심을 이해하고 전달하는 법.

p 013

 삶의 의미가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얻기 위한 도구적인 일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일과 그 자체를 위해 몰두하는 활동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지, 우디 앨런처럼 천문학적으로 먼 거리에서 삶을 관찰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을 도구적으로 보는 것, 이 것에 대한 언급은 <미움받을 용기> 라는 책에서도 한 번 들어봤던 개념이다. 그 때 분명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도구적으로 보지 않으려 노력하겠노라 다짐했건만, 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내가 그 다짐을 잊고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은 과도하게 도구화가 되어가고 있다는 작가의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나또한 그렇다. 나에게 있어 도구적이지 않고 그 자체로써 가치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봤다. 그런데 도구적이라고 생각하는지의 여부를 판가름 하는 것조차 어렵게 느껴졌다.


p 022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기본적인 전제 가운데 하나는 역설입니다. 그러니까 인문학을 포함해서 많은 학문은 바로 그 쓸모없음 덕택에 쓸모가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우리가 삶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는 쓸모만 따져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 깊은 의미에서, 더 실존적인 의미에서 쓸모가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술과 놀이, 사랑, 윤리 같은 가치는 쓸모없을 때, 그러니까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쓰이지 않고 그 자체로 목적일 때 가장 쓸모가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가 놀거나, 사랑을 하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은 그런 행동을 통해 다른 이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진자 알맹이가 되는 것, 의미를 주는 것은 이른바 이런 쓸모없는 일들입니다. 인문학은 바로 이러한 현상을 주로 다루기에 중요한 것이지요.

 

 21세기는 그야말로 효용성을 가장 중시하는 사회이다. 어렸을 때부터 가치있는 일 혹은 인성보다는 성적 순으로, 적당한 나이가 되면 응당 해야할 그에 걸맞는 역할들로 가득차있다. 만약 그 길을 향하는 여정에 있어서 나만의 샛길로 돌아가게 되어 조금이라도 늦어진다면, 인생 낭비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실 나 자체도 그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일명 "투자 대비 효율"을 최대화해야한다는 강박에 항상 갇혀있는 것 같다. 지금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이 순간까지도. 그러나 작가는 말한다. 쓸모없기 때문에 쓸모있는 일도 있다고.


p 025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찾는 데 몰두하기보다는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윤리적 가치로서 선은 그 자체로 목적인 반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보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수단일 분이니까요. 정말 최악의 경우에는 진짜 나를 찾는 일이, 앞서 언급한 경우처럼 좋은 사람이 되는 걸 막는 장벽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좋은 사람이 되는 동시에 진정한 자기 자신도 찾을 수 있다면 굉장히 근사하겠지요. 그러나 둘 가운데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제가 심리학을 비판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심리학은 개인이 다양한 심리학적 도구를 활용해 자기 자신을 찾고 계발하도록 돕는 일에는 도움을 줄지 모르지만, 개인을 윤리적ㆍ사회적으로 성숙시키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심리 치료가 시작된 이래로 100년간 우리 삶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심리학은 우리가 자기계발을 하거나 무언가를 배우거나 자아실현을 추구할 때는 지나칠 정도로 유용하지만, 쓸모없는 것은 완전히 무시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심리학, 적어도 심리학의 일부는 우리 사회의 도구화 현상뿐 아니라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문화, 더 나아가 노골적인 나르시시즘을 심화시키는 데도 기여합니다.

 

 나는 올해들어 심리학 책을 부쩍 많이 읽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나도 날 잘 모르겠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어서 였다. 심리학을 배워가면서 가장 많이 뇌리에 박힌 내용은 "인생따위 멋대로 살아도 좋은 것이다." 였다. 이런 태도가 너무나도 눈치를 많이보는 사회에서 분명 필요한 자세는 맞지만, 한편으로는 이기주의를 부추길 수도 있는 주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진정한 나 자신을 찾아가는 자세도 중요하지만, 어떤 내가 될 것인지 생각하고 또 직접 그러한 내 모습을 만들어가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같다. 내가 그렇게 되고 싶고, 또 그렇게 된다면, 그러한 모습 또한 진정한 나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작가는 이 책에서 10명의 철학자를 소개하며 10가지의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을 안내한다. 그동안 심리학 책을 읽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길의 방향을 제시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은, 이미 존재하는 사실에 대해서 의미를 찾고 관점을 달리 해서 해석하는 데에 집중했던 것 같다. 과거를 재해석하는 기분이었달까. 그러나 이 책은 미래를 말하고 있다. 당신이 이제는 뭘 해야할지에 대해 안내해준다. 효율이 철저하게 최우선 가치로 여겨지는 현대에서, 왜 내가 그토록 공허하고 허무했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책에서 제시하는 10가지 생각들>

1. 그 자체로 가치있는 일이 우리에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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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 자체를 위해 하는 것이 선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56p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중요한 것은 선을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라고 정의한 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선은 일반적인 효용성의 관점에서는 쓸모없는 것으로 구성되며, 또한 역설적이게도 쓸모없기 때문에 쓸모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59p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도구적 관계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런 관계를 맺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을 정의하는 본질적인 특징이라 말하지요. 비도구적 관계가 가능하지 않다면 우리는 다른 동물과 다를 바가 없는, 그저 진화가 많이된 원숭이에 불과할 테니까요.

 

61p

 그런 주관주의적 입장에서는 기본적인 가치를 둘러싼 근본적 차이에 관해 사람들은 끝내 타협하지 못하고 싸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개인이 주관적으로 인정하든 말든 선한 것이 따로 존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이 옳다면, 우리에게는 이성적으로 선의 가치를 논의할 가능성이 열립니다. 가치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태도를 다른 사람에게 들이밀며 싸우는 대신에 말입니다. 

 

62p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내가 그냥 그런 사람!' 이라서가 아니라 이성적 존재가 되는 일이 인간됨의 본질을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나답지 않아!'라고 생각하더라도 우리는 마땅히 인간으로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68p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세상에는 그 자체로 목적이면서 선한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고, 선이란 무엇인가 고민하면서 우리 삶을 이끄는 관점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선한 것은 그걸로 이익을 얻거나, 단순히 그걸 좋아하기 때문에 선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선하다는 이유 그 자체 때문에 선을 좋아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내내 단단히 지켜야 할 실존적 관점입니다.

2. 쓸모없기 때문에 쓸모가 있는 목적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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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성은 가격으로 따질 수도 없고 대체될 수도 없다"

- 이마누엘 칸트

 

80p

 등가성이란 말 그대로 '같은 값어치가 있다'는 뜻으로, 돈이 서로 완전히 다른 것들의 값어치를 측정하고 비교하는 데 쓰인다는 것이지요. 돈으로 따지면 셰익스피어의 전집은 운동화 한 켤레와 같은 가치를 지닙니다. 위대한 작가의 작품 전집을 운동화 한 켤레와 비교하는 게 어처구니없지만, 우리가 돈이라 부르는 도구는 그걸 가능하게 해줍니다. 우리가 바쁘게 일상을 살아갈 때는 이런 일이 어처구니없다는 것조차 잘 알아차리지 못하지요.

 

83p

 인간의 보편적인 경향성과 필요에 관련된 것에는 시장 가격이 있다.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취향에 들어맞는 것, 즉 순전한 재미와 놀이를 위한 것에는 애호 가격이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이 목적 그 자체가 될 수 있게 하는 조건에는 상대적인 가치인 가격이 아니라 내적 가치인 존엄성이 있다.

 

84p

 내적 가치를 지닌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목적의 왕국을 구성하는 구성원인 사람과, 사람을 목적의 왕국의 일원으로 만들어주는 것들입니다. 후자의 예로는 칸트가 말하는 '약속에 대한 충실함(정직)'과 '원칙에서 나온 선행(호의)' 같은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것에는 사람처럼 존엄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정직과 호의를 사고팔거나 이것에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행위에 가격을 매기고 구입하려 한다면, 그 과정에서 반드시 존엄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를 역설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겠네요. 진정한 가치를 지닌 것일수록 가격을 매길 수 없다고 말입니다.

3. 지키지 못한 것들에 왜 죄책감을 느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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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약속하는 동물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p100

 우리는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을 때 스스로를 더 잘 돌아보게 됩니다. 즉,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존재와 행동을 해명하라고 요청받을 때, 비로소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나 자신과도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지요. 만약 다른 사람에게 이런 요청을 받지 않는다면, 즉 무인도처럼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 놓인다면 우리는 반성을 통한 자의식을 키울 수 없게 됩니다.

 

p101

 어쩌면 아이는 자신이 정말 왜 그랬는지 모른다 해도 자신의 행동을 해명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비로소 아이는 책임감 있는 존재로 대접받지요. 발달심리학은 타인에게 책임 있는 존재로 대우받았다는 사실이 아이를 책임감 있는 존재로 만든다고 합니다. 니체의 표현처럼 타인과 약속할 권리를 지닌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이런 과정에서 죄책감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버틀러의 말처럼 "죄책감은 주체가 되는 것을 가능케" 하니까요.

 타인과 맺은 약속에 대한 책임과 죄책감이 있기에 아이는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행동도 평가하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단지 하룻밤 사이에, 또는 죄책감을 느낄 일을 겨우 한두 번 경험한 뒤 곧바로 책임감 있는 존재가 되지는 않습니다. 책임감 있는 존재가 되는 과정은 길고,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차츰 주체성을 확보하고, 자기반성적 개인을 창조합니다. 달리 말해, 우리는 약속할 권리를 지닌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p103

 하지만 오늘날의 도구화된 문화에서는 이런 토대가 점점 약화되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사회는 새로운 것을 좇고 일시적으로만 합의되는 일이 늘고 있지요. 우리는 서로 당분간 약속을 지킵니다. 어쨌든 약속을 하긴 하지만 더 나은 것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유지하는 거지요. 더 좋은 모임, 더 좋은 일자리, 더 좋은 연인이 나타날 때까지만 유지되다가, 끊임없이 더 나은 것으로 대체하지요. 이는 급변하는 유행에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 심리인 포모증후군(FOMO; Fear Of Missing Out)에 걸린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당분간만 지속되는 약속은 엄밀히 말해서 더 이상 약속이 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그런 약속을 하는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득을 주는 도구화된 약속일 뿐이지요.

 

p104

 약속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설령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약속을 지키는 일에는 존엄한 면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약속은 우리 삶의 단단한 관점이 됩니다. 결코 도구화될 수 없는 본질적인 가치가 있으니까요. 그러한 약속을 토대로 굳건히 서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인간성은 너무도 쉽게 흔들리고 말 것 입니다.

4.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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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란 관계 그 자체와 관계하는 관계다"

- 쇠렌 키르케고르

 

p114

 도덕적으로 분노하거나 책임을 묻는 일은 오직 상대가 자신의 행동과 관계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상대가 키르케고르가 말한 자기라는 개념을 갖고 있을 때, 칸트가 목적의 왕국이라 부른 것에 속할 때에만 말이지요. 따라서 이 자기라는 개념은 인간이 본성과 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의미 있는 삶을 사는 토대가 될 수 있으며, 굳게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훌륭한 관점이 되는 것이지요.

 

p116

 우리는 자아발달 과정에서 고립된 상태가 아니라, 오직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반성적 자아를 기릅니다. 갓 태어나 말도 못하는 작은 인간이 칸트가 말한 존엄을 지닌 개인이 되기 위해서는 부모, 형제자매, 친구 등 무수히 많은 타자의 눈을 통해 자신을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할 때 비로소 우리 자신과 관계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는 셈입니다.

 

p122

 이와 달리, 오늘날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자아 개념은 이미 도구화가 됐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자기계발로 최적화되어야 할 상품이 되었지요. 심지어 연애나 우정 같은 인간관계에서도 효율성을 따지게 될 정도로 말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일이 의미가 있고 그 자체로 목적으로 삼을 만해서가 아니라, 오직 행복과 성공을 성취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가 될 때에만 그것을 활용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 속에서 자아는 더 나은 성과를 좇는 개인의 또 다른 도구가 됐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도구로 만들어버린 것이지요. 지금도 경영학과 자기계발의 권위자라는 사람들은 줄줄이 여러분 앞으로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가장 중요한 경영 도구는 당신 자신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 이 강의에서 강조하는 10가지 관점은 그 자체로 도덕적인 가치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바로 약속, 책임, 진실, 사랑, 용서 같은 것들이지요. 사람은 이러한 가치를 통해 보다 건강하게 자기 자신과 관계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도구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인 흐름과는 달리, 저는 이런 가치가 여전히 존재하며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p123

 그러니까 우리를 구성하는 관계의 중요성을 잊지 않는 것은 삶을 보다 의미 있게 만드는,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 일입니다. 이러한 반성적 자기 관계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어떠한 책임도 의무도 도덕성도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요.

5. 불확실한 세상에서 신뢰를 쌓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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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진실할 수 있다"

- 한나 아렌트

 

p131

 우리는 삶을 '조에(zoe; 생물학적 생명)'보다는 '비오스(bios; 정치 공동체적 삶)'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스 고전 철학자의 생각을 되살린 이 개념에서 '조에'는 인간이나 개, 고양이 같은 동물로서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관점으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삶을 의미 있는 방식으로 능동적으로 살아가며, 그것을 의미 있는 다양한 이야기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비오스, 일대기로서의 삶인 것이지요.

 

p133

 이처럼 뚜렷한 목적 없이 아무렇게나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의 본성을 철학 용어로는 '우연성'이라고 하는데요. 지금까지 계속 달라졌고 앞으로도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세상은 분명 우연적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우연적인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우리가 굳게 딛고 설 실존적 관점을 주장하는 것은 쓸데없거나 순진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렌트를 비롯해 제가 강의에서 소개하는 여러 철학자라면 우연성 자체보다 우리가 이 우연성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망르 격언처럼 듣고 삽니다. 누구나 예측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유연하게 적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주장은 결과적으로 지금 같은 상태를 유지하자는 말일 뿐, 현실의 문제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대응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좀 더 현명한 응답은 이런 것입니다. 안정성은 세상에 주어진 조건아 아니기에, 그것을 만드는 일이 바로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보다 진실하게 말하고 믿을 만하게 행동하려고 애씀으로써, 이 우연적이고 유동적인 세상을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영원하고 변함없는 구조를 이 세상에 세울 수는 없겠지만, 몇몇 중요한 윤리적 가치를 관계 속에서 만들어 갈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전부일 것입니다. 그러려면 삶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삶을 대상화하지 말고, 그 내부의 구체적 현실에서부터 삶의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p136

 물론 진실에 대한 요구는 종종 다른 요구와 충돌할 수도 있습니다. 진실을 지키기 위해 큰 손해를 입거나 심지어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지요.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은 우리가 언제든 이처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실존적 진실에는 근본적인 존엄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건강하거나 성공하거나 행복해지기 위해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운이 좋아서 이 모두를 동시에 얻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진실과 신뢰를 지키며 살아야 하는 이유는 오직 그것이 그 자체로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6. 타인에 대한 나의 영향력을 점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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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은 그의 삶 무언가를 손에 쥐는 일이다"

- 크누 아이레르 로이스트루프

 

p144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삶이 이처럼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입니다. 삶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는 일"이며, 그것을 통해 "그 사람 삶의 무언가를 자기 손에 쥐게 되는 일"입니다. 이를 토대로 로이스트루프는 '윤리적 요구'라는 개념을 이끌어냅니다. 윤리적 요구란 바로 "당신에게 건네진 다른 사람의 삶을 보상피라는 요구"이자 책임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에게 의존하며, 당신의 권력(힘)이 닿는 범위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의 삶의 일부를 돌봐야 한다는 요구는 사람 사이의 근원적인 상호 의존과 직접적인 영향력에서 생겨난다."

 

p146

 따라서 우리는 권력을 휘두르거나 제거해버리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써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윤리적 요구이지요. 이런 윤리적 요구가 없다면, 우리는 지금 생활하는 것처럼 상호 의존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p155

 세넷은 장인을 그 일 자체를 잘하려는 욕망과 사명감을 가진 존재로 정의합니다. 외과의사든 목수든 프로그래머든 교사든 어느 한 분야의 장인은 자신의 일 그 자체에 몰두합니다. 세넷은 이것을 보다 넓은 관점에서 정의합니다. 완성도 높은 좋은 작업이 어떤 것인지 규정하는 특정한 기준을 가지고 업무를 수행하며, 그런 기준을 토대로 신참을 교육하기도 하는 창조적인 활동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일터에서 사람들을 움직이는 동기는 돈이나 승진 같은 개인의 성공입니다. 일 그자체에 집중하는 장인과는 관심사가 아예 다르지요. 돈을 위해 일을 하든 개인적인 성공을 위해 일하든, 어쨌든 그들에게 일은 도구가 되어버립니다. 그게 반드시 잘못됐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넷은 일 자체를 잘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마침내 훌륭한 경지에 도달하는 장인의 소망이야말로 우리가 삶의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7. 내가 아닌 존재에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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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우리 자신 외에 다른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가능한 무척 어려운 깨달음이다"

- 아이리스 머독

 

p163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의식은 개인과 별개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서 나옵니다. '실존하다(exist)'는 말은 '나타나다'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는데요. 먼저 우리의 의식이 있어야, 세상에 의미나 목적, 가치가 생겨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실존주의를 일종의 주관주의로 만듭니다. 이러한 주관주의적 입장에서 의미는 오로지 개인의 가치 선택을 통해서만 생깁니다.

 이처럼 사르트르가 삶의 관점을 선택하거나 창조해야 하는 것으로 보는 반면, 머독은 관점이 선택될 때보다 주어질 때가 많다고 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렇게 주어진 것을 인식하고 발견하는 일이지요. 머독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우리 주변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충분히 관심을 가진다면, 별다른 문제없이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여러 관점을 통해 무슨 일이 옳은 지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머독은 우리가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실존주의가 말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따지고 선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우리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사회에, 그리고 다양한 상황에 따르는 사람들의 행동에, 그리고 주된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p165

 머독에게 선은 최고의 개념입니다. 다른 모든 개념을 판단하는 기준점이 되지요. 예를 들면 우리는 이런 식의 문답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공평해야 한다. 그렇다. 그런데 공평은 항상 선한가?'

 

p168

 무엇이 선인지는 개인이 혼자 정할 수 없습니다. 선을 구성하는 것은 우리의 주관 너머에 있지요.

 

p177

 머독의 메시지는 사랑이 단지 주관적인 느낌이 아니라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다른 무언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는 과정 그 자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굳이 우리 자신을 사랑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니까요. 사랑은 도구화되는 순간 그 의미를 상실합니다. 사랑은 오직 이런 것입니다. "널 사랑해, 정말로.(I Love you, period.)" 바로 미국의 록밴드 조지아 새틀라이츠의 댄 베어드가 노래한 것처럼 무조건적이지요. 우리가 도구화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사랑의 진짜 의미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 말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8. 불가능하기에 가능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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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일이다"

- 자크 데리다

 

p192

 용서에 대한 데리다의 해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 진정한 용서는 무조건적이라는 것입니다. 용서가 수단이 된다면 더 이상 용서일 수 없으니까요. 둘째, 용서할 수 없는 것만 용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용서, 예컨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말므로스의 용서 같은 것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을 상호성과 대칭성, 예컨대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는다는 논리로 이해합니다. 반면 용서라는 개념은 관계가 상호적이고 대칭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명백하게 도전합니다. 다른 어떤 실존적 관점들보다도 강하게 말이지요. 데리다는 "네가 용서를 구하고 앞으로 달라지겠다고 하면 널 용서할게"라는 식으로 조건이 붙는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p195

 내가 그곳에서 카스트루프 공항에 혼자 서 있는 아버지를 봤을 때, 처음에는 진짜 뭣 같은 기분이었다. 늦은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마중 나오리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얼마나 외로운지 알 수 있었다. 그건 너무 실존적인 상황이었다. 뭐 어쨌든 결국 우리는 혼자니까 말이다. 나는 아버지가 늘 어른이고 강하며 제멋대로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으로 여겼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훨씬 더 복잡한 존재로 보였다. 나는 그때 그 자리에엇 아버지를 용서했다. 그때부터 영원히. 그 용서는 아버지가 내게 저지른 일에 관한 게 아니다. 물론 아버지가 내게 한 일들 자체는 여전히 용납할 수 없다. 다만 그건 그냥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하는 용서였다.

 이 글에 묘사된 용서는 실존적인 의미에서 미리 계획되거나 계산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터져나온 것입니다.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일어난 거지요. 의식적인 선택의 결과가 아니었음에도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테페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그건 내가 드디어 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내 삶에서 최고의 경험 가운데 하나였다. 아버지를 용서하고 싶던 적이 없었음에도 그를 용서한 것 말이다."

 그의 이야기는 용서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관심의 윤리적 중요성을 강조한 머독의 생각과도 통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용서가 한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에게 관심을 기울일 때 가능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p196

 데리다는 윤리적 선택을 할 때 모든 상호성과 대칭성을 거부하라고 말합니다. 이런 입장은 레비나스와 로이스트루프의 철학에서도 보이지요. 윤리적 요구에 대해 이들은 그 무조건적 본성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거나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그와 똑같은 행위를 기대해서가 아닙니다. 무언가 선한 것을 돌려받으리라는 기대로 선한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기에 선한 일을 해야 하는 거지요. 로이스트루프는 윤리적 요구의 일방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윤리적 요구의 일방성은 바로 개인의 삶 역시 끊임없는 선물이라는 이해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우리가 실천하는 일의 보답으로 다른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은 있을 수 없다." 윤리의 비대칭성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표현한 문장이 또 있을까요. 동시에 오늘날처럼 도구적 사고가 만연한 사회 흐름에 역행하는 말이 또 있을까요.

 로이스트루프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선물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용서를 비롯해 제가 강의에서 제시하는 여러 삶의 관점을 당연히 받아야 할 선물이나 이익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그 가치를 주관적인 욕구 충족으로 떨어뜨려서 고유의 가치를 파괴하게 될 테니까요.

9. 어떤 순간에도 희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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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특권이 아니라 책임으로 이루어진다"

- 카뮈

 

p203

 앞에서 저는 인간에게 자유의자가 없고 모든 행동이 이미 결정됐다면, 우리가 제대로 살아갈 수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는데요. 실제로 우리가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유가 있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칸트가 지적한 대로, 어쩌면 우리는 진짜 자유의지가 있는지 없는지 최종적인 해답은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런 가정을 통해 우리는 목적의 왕국이라 불리는 곳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며 서로 관계할 수 있고, 의미 있는 삶도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p214-215 요약

 이론적으로는 어느 친절한 독재자가 나타나 국민이 자기 욕망과 목표를 상당히 실현할 수 있도록 보장할 수도 있지요. 이것이 바로 소극적 자유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지만, 정작 우리가 원하는 것 자체를 누가 결정하는지에 대해서는 교려하지 않는거지요. 우리가 품게 되는 욕망은 철저하게 상업화된 시장과 대기업 자본에 의해 조장된 것일 수도 있고, 또 디스토피아 과학 소설에 등장하는 것처럼 놀라운 기술력에 의해 강제로 주입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이와 달리 적극적 자유는 무언가를 향한 자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통제하는지, 또 우리는 무엇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 깊이 성찰하는 거지요.

 그러나 누구도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호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사회와 공동체 안에서만 자기를 반성할 수 있고 자율성도 가질 수 있지요.

 따라서 우리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적극적 자유를 추구할 수 있게끔 길러줄 건강한 공동체를 가꾸고 돌볼 책임이지요. 이 문제는 자유와 책임이 서로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출발점으로 우리를 되돌려 놓습니다. 우리에게 자유가 없다면 의무를 실행할 책임도 없겠지요. 칸트의 말처럼 '해야 한다' 속에는 '할 수 있다'가 내포되어 있으니까요.

 

p219

 우리에게는 자유를 어떻게 정의하든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자유를 도구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는 그냥 좋은 것입니다. 그게 개인의 행복을 증진하거나 국가 경제에 득이 되지 않더라도 말이지요.

10. 내 삶의 노예가 되지 않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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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법을 배운 사람은 노예가 되는 법을 잊는다"

- 미셸 드 몽테뉴

 

p224

 우리가 유한한 시간을 산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경험과 행동은 비로소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무심한 우주에서 가치가 생겨날 수 있는 좁은 문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덕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사람이 영원불멸의 존재라면 용기나 인내, 자기희생 같은 덕은 굳이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존엄성이나 사랑, 용서 같은 것도 크게 의미가 없겠지요. 삶의 유한성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가치 있는 것을 찾을 수 있고 궁극적으로 삶 그 자체에도 매달리게 됩니다. 언제든 빼앗길 수 있는 것이기에, 역설적으로 굳게 지켜야 할 의미가 있는 거지요.

 요나스는 오로지 유한한 존재만 가치를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요컨데 '필멸성'이 '도덕성'의 전제 조건이 되는 거지요. 머독 역시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 모두 죽는다는 걸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덕이야말로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처럼 죽음은 그 자체로 덕은 아니지만, 다른 덕을 위한 의미 있는 관점을 탄생시키는 토대가 됩니다.

 

p226

 "철학은 본질적으로 죽음을 위한 준비다."

 

p227

 이게 죽음의 역설입니다. 죽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의미나 가치를 가질 수 없지만, 동시에 죽음 자체는 바로 그 의미와 가치를 위협합니다.

 

 '메멘토모리(memento mori)', 즉 '네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p232

 몽테뉴에게는 이것이 자유의 전제 조건이었습니다. 몽테뉴는 자신이 죽음에 매혹되었다고 말하며 사람들이 죽는 다양한 방식을 목록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하며 글을 끝맺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죽음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은 동시에 사는 법도 가르칠 것이다."

 

p234

 지금 당신에게 엄청나게 중요해 보이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지금까지 성취했고 성취하고 싶은 모든 것, 살아가며 맺어온 모든 관계, 일상적인 온갖 사건과 걸림돌과 걱정도 당신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이 짧은 삶을 왜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에 보내는가? 우리 존재는 밤에 날아다니는 반딧불이와 같다. 삶은 잠시 훅 타오르고 나면 사라진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큰 영감을 주는 생각이다. 당신은 바로 이곳에 매우 짧고 집약적으로 머문다. 그런데 왜 당신에게 주어진 삶을 최대한 이용하지 않는가?

 매닝은 형제를 잃은 경험을 이야기하며, 그 상실로 인해 살아 있는 시간을 더 귀하게 여기게 됐다고 말합니다. 그는 '메멘토 모리'라는 오래된 생각을 인용하지만 사실 그가 내린 결론은 고대 철학자들의 태도와는 정반대입니다. 매닝은 삶이 언제든 끝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행동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에게 코칭은 개인이 자기 꿈을 완전하게 실행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입니다.

 그의 웹사이트 글에 따르면 코칭은 우리의 발목을 잡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동기를 부여하고 성과를 개선하는 데 확신을 줍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철학적 삶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철학적 삶의 초점은 우리가 가진 꿈이나 욕망을 최대한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아니라, 그 꿈이 우리의 짧은 삶에 비추었을 때 과연 추구할 가치가 있는지 따져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코칭 자체를 완전히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메멘토 모리'에 대한 전형적인 이해가 '얼른 서둘러! 꿈을 찾으라고! 꿈을 막는 장애물은 치워버려!'라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런 메시지는 다시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서둘러 꿈을 찾으라는 태도는 마음의 평화와 성찰을 추구하는 철학과는 거리가 멉니다.

 아마 라이프 코치는 이렇게 초조하게 물을 것입니다. "대체 뭘 기다리는 거야?" 그러면 철학자는 이렇게 담담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죽음."

 이 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과 관계에 깊이에 대해 표현하는 방식이 정말 마음에 들었던 책이다. 이 책은 세상을 증오하면서도 그 세상을 재건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그 과정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마을에 대한 추억과 사랑의 정도, 사람들간의 유대, 또 (보통) 두 인물들간의 감정적 유대에 대해 묘사하는 부분들이 나중에 언젠가 또 다시 읽고 싶은 책이었다. 소설 속에서는 책 제목인 '지구 끝의 온실' 이라는 이야기가 발간되었다고 했다. 이런 부분들은 마치 독자인 내가 책 속 세계관에 들어가서 그 세계관의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잡지로 읽는 듯한 기분이 들게했다. 또 식물에 대해 엮어낸 이야기도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 부분도 많았지만) 상당히 흥미로웠다.

 

 

 

 

 

이 다음 내용은 내가 기록해두고 싶은 책 속 구절들이다.

 

 

(두 사람간의 관계들에 대한 부분들)

 

(아마라&나오미)

 아마라는 이제 말을 하는 대신 화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고 나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아마라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침착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돌핀이 폐허를 빠져나왔을 때, 아마라가 조종 장치를 붙잡은 채 울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죽은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려고 했다. 그들이 내게 해준 말도 기억하려고 했다. 아무것에도 마음 붙이지 말고 그냥 어디로든 도망치라고. 그러다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땐 정말로 죽는거라고. 마지막으로 그 이름들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타티야나, 마오, 스테이시, 그리고 ······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는 다 잊어버릴 이름들이었다.

*

 나는 아마라가 나를 떠나버릴까봐 두려웠다. 이 끔찍한 세계에서 아마라마저 없다면 나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아마라는 자신이 내 발목을 붙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아마라가 작은 배낭을 메고 새벽에 조용히 나가는 걸 붙잡은 적도 있었다.

 "어디 가?"

 내가 한참이나 아마라를 노려본 끝에야 아마라는 다시 침대로 와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마라가 아침까지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거친 숨소리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지수 & 레이첼)

 그리고는 지수 씨가 손을 뻗어 내 곱슬머리를 잔뜩 헤집어놓았다. 그때 지수 씨가 나에게 보내던 다정한 시선은, 그가 레이첼과 대화를 나눌 때는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것이었다. 지수 씨는 레이첼을 볼 때면, 무언가 홀린 것 같으면서도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표정을 자주 지었다. 그 자리에서 도망쳐 사라지고 싶은 것처럼.

 그 표정을 보면서, 나는 막연히 생각했다. 나에게 좋은 사람이 타인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고. 어쩌면 지수 씨가, 나와 레이첼에게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

지수는 그런 레이첼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그의 사고와 내면과 감정이 궁금했다. 그가 설령 지수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다고 해도, 그럼에도 살아 있는 한 지수를 필요로 할 것이라는 사실에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시간이 지날수록 레이첼의 신체 구조는 유기체와 기계가 복잡하게 엉긴 형태로 변해갔다. 보통의 정비사라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곤란함을 느꼈겠지만, 지수는 눈을 감고 그려볼 수 있을 만큼 레이첼의 몸에 익숙해졌다. 이 마을 전체가 의존하고 있는 레이첼은 오로지 지수에게만 의존하는 사이보그였다. 레이첼은 지수의 소유가 아니지만 지수를 결코 떠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식물들과 온실과 자신의 신체를 유지하기를 원하니 앞으로도 지수가 필요할 것이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 외에는 침묵만이 가득한 온실에서 숨을 죽이고 핀셋 끝을 들여다보는 레이첼. 아주 작은 표본 하나에 오랫동안 시선이 머무르는 레이첼. 그런 레이첼을 유리창 너머로 보고 있으면 지수의 숨도 멈출 것 같았다. 그러다 레이첼과 눈이 마주치면 그 꿰뚫는 듯한 시선이 지수의 비밀스러운 생각을, 레이첼에 대한 집요한 호기심을 낱낱히 읽어내는 것 같았다.

*

지수가 처음에 느긴 감정은 의아함이었다. 그건 이미 예전에 다 끝난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온실은 어짜피 유지될 수 없다는 것, 이곳을 떠나도 지수는 정비사로서 레이첼을 따라가리라는것, 그가 지수를 필요로 하는 동안, 당분간은. 그것이 거래였으니까······

 하지만 레이첼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았을 때, 그리고 얼마 전 그가 말한 감정적 끌림을 떠올렸을 때, 문제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지수는 깨달았다. 그렇게 애원해도 숲 밖으로 식물들이 나갈 수 없었던 이유, 레이첼이 알면서도 숨겨온 이유를.

*

 "아주 오랫동안 그를 생각했어요. 지수가 정말로 나의 기계 뇌에 그런 짓을 했는지, 아니면 그냥 둘러댄 말이었는지, 만약 그게 진실이라고 해도, 그게 그렇게까지 잘못된 일이었는지. 대체 마음은 언제 어디서 시작되는지. 지수와의 대화를 떠올리고, 그것을 곱씹고, 다시 절망하기를 반복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오랜 시간 그를 잊을 수 없다면······ 나의 감정은 그 자체로 진실한 것이 아닌지 생각했지요."

*

 "맞아요. 그건 핑계에 가까웠습니다. 지수가 나를 되살렸을 때, 나는 그에게 호기심이 생겼던 거예요. 그게 진짜 이유였죠. 다시 죽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지수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고 신경이 쓰였어요. 자신도 인류를 구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으면서, 차라리 세상이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저에게는 구원자가 될 것을 요구하는 뻔뻔함이 흥미로웠죠. 그를 지켜보고 싶었어요. 생각해보면 저의 호기심도, 지수가 제게 가졌던 것과 근본적으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내면을 평생 궁금해하기만 하다 끝나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

"지수 씨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을 알아요. 할 수만 있다면 온실을 다시 찾아가려고 했을 텐데, 그러지는 못했나봐요. 당신도 그곳에 가볼 수 있을 거예요. 어쩌면 당신에게 남긴 말도 다시······"

 아영은 레이첼의 표정을 보고 말을 멈췄다.

 "레이첼, 괜찮아요?"

 레이첼은 이제 울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마치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과 마음이 그의 일그러진 표정 위에 있었다. 아영은 레이첼을 위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

 레이첼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날, 아영은 그에게 지수의 기억 칩을 건네주었다. 레이첼은 지도의 좌표를 건넸다. 어디라고 말해주지는 않았는데도 아영은 그곳이 어디인지 이미 알 것 같았다. 레이첼에게 가보지 않아도 괜찮겠냐고 물으려다가, 아영은 그의 얼굴에 떠오른 흐릿한 표정을 보았다. 이미 그가 그곳에 몇 번이고 가보았으리라는 것을, 아영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살인을 하기도, 신비감을 주기도, 생명을 살려주기도, 누군가들의 추억이 되기도 하는 모스바나)

 밖으로 나온 밀리어가 바닥에 떨어진 잎을 주웠다. 며칠 전 심었던 덩쿨식물의 갈퀴 모양 잎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밀리어를 향했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목격하고 있었다.

 살아남은 마을과, 살아남은 식물, 그것 사이의 연관성을.

 밀리어가 덩굴 잎을 들어올렸다. 잎에서 푸른 먼지가 떨어져 흩날렸다.

 "우릴 구했어요. 이 식물이······"

*

 더스트 폭풍에 살아남으려면 덩굴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덩굴은 사람들을 굶주리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아름다워 보였던 푸른 먼지는 이제 고통의 근원처럼 느껴졌다. 내성이 약한 사람들에게 자진해서 마을을 떠나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생겼다. 지수 씨가 한 번만 더 그런 말을 대놓고 했다간 가만두지 않을거라고 화를 내자 다툼은 잠잠해졌지만, 한번 싹튼 불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라는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

 "여러 번 시험해봤지만 응집이나 제거 현상과는 무관하게 나타나. 개량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이었어. 중립적인, 불필요한 돌연변이. 아마도 비료에서 발생하는 아산화질소와 반응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공기중의 특정 분자와 반응해서 발광성 부산물이 생성돼. 그게 흙이나 먼지 입자에 달라붙지. 간단한 유전자 조작으로 특성을 없앨 수 있어. 쓸데없이 시선을 끄는 특징이니까 제거할 생각이야."

 "그렇구나. 불필요한 돌연변이라니······"

 불을 켤 생각도 않고, 지수는 한참이나 상자 속의 푸른 빛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아름답네."

 그렇게 말하는 지수를 레이첼이 불끄러미 보고 있었다.

*

 지수는 밤새도록 바위에 앉아서, 숲을 가득 채운 푸른 먼지들을 보았다. 아름다움 외에는 아무 기능이 없는, 그러나 결국 제거되지 않은 푸른빛들을.

 

 

 

(프림빌리지, 애착과 이별)

 뭐가 옳은 건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세계를 말하는 것이 이상했다. 프림 빌리지 바깥의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인류 전체의 재건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만큼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버려졌다. 그들은 우리를 착취하고 내팽개쳤다. 그 사실만은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버려진 우리가 세계를 재건해야 할까.

*

 "돔을 없애는 거야. 그냥 모두가 밖에서 살아가게 하는 거지. 불완전한 채로. 그럼 그게 진짜 대안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 똑같은 문제가 다시 생길 거야.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 뭔가를 해야 해. 현상 유지란 없어. 예정된 종말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을 계속해서 벌이는 것 자체가 우리를 그나마 나은 곳으로 이동시키는 거야."

 나는 지수 씨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돔을 어떻게 없앤다는 것인지, 그 밖에서 어떻게 모두가 살아간다는 것인지······

 "하지만 프림 빌리지는 무너지지 않았어요. 여기도 대안이잖아요. 레이첼의 식물들이 있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안전할 거예요. 외부로부터의 공격은 맞서면 되고요. 저도 같이 싸울 거예요."

 내 말에 지수 씨는 침묵했다. 나는 절박한 심정이 되어 말했다.

*

 아마라와 대니가 호들갑을 떠는 동안, 나는 이상하게도 지수씨의 시선이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수 씨가 이 순간을 눈앞에 두고도 그리워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내 짐작일 뿐이었지만, 나는 그런 지수 씨가 자꾸 신경쓰였다.

*

 나는 지수 씨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꾸 이곳을 떠나는 상황을 가정했던 이유도, 나에게 분해제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 이유도 이제 알 것 같았다. 지수 씨는 이 풍경을 보면서 동시에 이 풍경의 끝을 상상하고 있었다.

 사실은 나도 짐작하고 있었다. 프림 빌리지는 영원하지 않을거라는 걸. 그렇지만 이곳에 남겠다고 거듭 말하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곤 했다.

*

 하루는 그림을 찢어버리겠다고 날뛰다가, 아마라가 말리고 토닥여서 겨우 진정한 다음에는 그림을 구겨서 구석에 던져두었다. 하루는 엉엉 울다가 대니를 욕하고, 또 지쳐 쓰러져 있다가 다시 대니를 욕하기 시작했다. 아마라가 하루를 달래는 것을 나는 지켜보았다.

 "대니는 자신의 방식을 원했던 거야. 우리랑 의견이 달랐지. 그러니까 이 마을이 지속될 수 있느냐는 것에 대해서 말이야."

*

 지수는 침입자들의 추적을 막기 위해 시간 차를 두고 다른 방향으로 사람들을 보냈다. 그들 중 일부는 밖에서 합류에 성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다른 프림 빌리지를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프림 빌리지는 분열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서서히 무너졌다. 아니, 처음부터 그 끝은 예정되어 있었다. 영원한 도피처는 없다. 이곳에서 함께했던 사람들의 시공간은 다시 겹쳐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약속하고 있었다. 이 숲을 나가도 레이첼의 식물들을 심겠다고. 숲 바깥 세계에서 가능성을 찾아보겠다고. 프림 빌리지를 만들겠다고. 그러니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지수는 그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면서, 손을 잡고 안으면서,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바라왔는지를 알았다. 지수야말로 프림 빌리지를 끝까지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 세계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랐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

 "시간이 흐를수록, 모스바나가 무엇인지가 제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에요. 저는 그냥 그곳에서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던 거예요. 프림 빌리지를 다시 만들 수 없다는 것도, 그런 곳은 오직 프림 빌리지뿐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식물들을 심었어요. 오직 그것만이 저를 살아가게 했으니까요."

*

 점들은 서로 다른 대륙에, 각각의 나라에 찍혔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출발해서 세계 곳곳으로 향하는 선이 이어졌다.

 "한 명이 아니었어요. 한 장소도 아니었죠. 온실에서 떠난 이들이 거의 같은 시대에 각자 도착한 곳에서 모스바나를 기르기 시작했어요. 여기가 나오미와 아마라, 당신들이 도착한 지점이죠. 그리고 여기는 중국 남부 지역이고요. 또 여기는 독일이고, 이렇게 점으로부터 퍼져 나간 선을 전부 그어보면······ 거의 세계의 전 대륙에 최초의 모스바나들이 심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래서 모스바나들이 그렇게 단기간에 지구를 뒤덮을 수 있었던 것이죠."

 아영은 자신이 이 논문의 데이터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어떤 놀라움과 슬픔,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을 나오미도 만나게 되기를 바랐다. 아영은 나오미가 지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오미의 표정이 점차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오미가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만이 아니었군요. 모두가 잊지 않았어요."

 "맞아요. 당신들이 약속을 지켰고, 세계를 구한 거예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그곳을 떠나서도 프림 빌리지를 재현하려고 했을 뿐이에요. 결국은 그러지 못했지요. 그러지 못했는데······"

 나오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지도 위의 점들이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아영은 설명을 멈추었다. 이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나오미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점들의 이름을.

 

 

 

(그 외)

 - 내가 말했지? 못 찾겠으면 얼른 돌아와. 해결책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니까.

 아영은 내용을 읽고 피식 웃었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문제를 푸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고, 목적지로 가는 길도 여러 경로가 있다. 그렇지만 굳이 온유에 이렇게 찾아온 것은 이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아영은 이 문제를 푸는 일이 과학자로서의 호기심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감정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영은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한, 신비로운 과거를 가지고 있지만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버린 한 사람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 그리고 그리움. 지금 시점에서 이희수를 찾는 까닭은 그것이 최적의 해결책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영의 마음이 이끌리는 곳이 바로 그 길이기 때문이었다.

*

 지수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이런 광경을 보아왔기에, 이 공동체의 끝이 어떻게 될지도 알고 있었다. 아마 저러다 몇은 죽고, 몇은 돔 시티로 갔다가 도로 쫓겨나고, 몇은 대피소에 거금을 주고 들어가겠지. 배신감을 느낀 사람들이 서로를 고발하고 죽일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시시한 결말이었다. 공동체가 처음에 내건 기치가 얼마나 거창하고 아름다운지에 관계없이 다들 그랬다.

 

"그렇지만 이상하지 않냐. 너는 희생자 쪽 사람이잖아. 그런 네가 속죄를 해야 하다니."
유사쿠가 말하자, 아키히코는 뭔가 눈부신 것이라도 보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게 어떤 피가 흐르는지는 관계없어. 중요한 건 내게 어떤 숙명이 주어졌는가야."
"숙명."
그 말은 유사쿠의 머릿속 저 밑에서 울렸다. 동시에 조금 전 우류 가에 입양된 아키히코를 질투한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 숙명을 위해 아이다움을 잃고, 인생의 대부분을 희생해야 하는 처지를 어떻게 부러워할 수 있을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이를 테면 태생이나 성별, 부모님 혹은 가정 환경등이 그렇다. 모두 내 선택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을 내 선택도 아닌데 왜 짊어져야 하느냐며 불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인만큼 짊어져야만 하는 부분인 것이다. 그런 것들은 거부권따위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게 숙명이 아닐까. 인생은 물론 나의 선택의 연속으로 꾸려지기도 하지만, 이런 보이지 않는 실로 짜여져 있는 듯한 숙명같은 부분도 있다. 이런 것들은 온전히 나의 몫이고 어찌됐건 짊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청혼을 받아들였다. 딱히 무엇이 결정타가 된 건 아니다. 한마디로는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막연하지만 받아들이는 편이 좋겠다는 방향으로 굳어졌다. 그 요인 중에는 연애와 결혼은 별개라고 주장하는 친구의 권유와 말은 하지 않지만 미사코가 청혼을 받아들이길 바라는 부모님, 그리고 세속적인 통념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최종적인 그녀의 심경을 되도록 적확하게 표현한다면 '거절할 만한 이유가 없어서.'일 것이다.
미사코는 모두에게 말했다. 신데렐라가 될 거라고.

거절할 만한 이유가 없어서, 흘러가는 데로 살다보니, 여기에 다다랐다. 이런 것도 숙명에 한 부분인 것일까. 사실 인생에 있어서 선택을 할 때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 선택하기보다 어쩌다보니, 그냥, 그 선택을 하지 않으면 이상해서, 그런 선택을 하는 순간들이 더 많다. 찰나의 가벼운 이유이지만 그 찰나가 앞으로의 미래를 결정한다면 그것도 숙명인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은 것 같다.


"미사코에게 마음을 열고 싶었다. 간절히 그러길 바랐어.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런 마음이 더 커져 갔어.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되면 비밀을 계속 지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어. 다 얘기하고 후련하게 지내고 싶지 않을까 두려웠어. 방문을 열쇠로 잠그는 것은 미사코가 들어올까 봐서가 아니라 내가 미사코에게로 도망치는 걸 막기 위해서였어."
"마음의 열쇠인가······."
"그런데 감성이 예민한 미사코는 그런 부자연스러움을 바로 알아차린 것 같아. 나로서는 완전히 체념했지.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었어."

누구에게나 주어진 숙명처럼, 누구나 하나씩은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가 있는 것 같다. 그 숙제도 어떻게보면 숙명의 한 부분이며,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아니면 해결하지 않을 것인지는 본인의 선택이지만 그러한 숙제가 주어졌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살아가면서 풀어가야 하는 숙명의 일부분인 것 같다. 아키히코의 경우 그 문제를 풀어가지 못하는 기간이 길수록 진실의 무게도 점점 더 무거워졌고 그 기간과 무게만큼 미사코와의 관계도 부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유사쿠는 좀 전에 만난 미사코를 떠올렸다. 그녀가 우류 가로 돌아간 것은 아키히코의 결의를 느껴서일 것이다. 어딘가 빛이나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유사쿠는 두 번 다시 그녀의 마음이 자기한테 향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완패다."
유사쿠는 중얼거렸다.
"응?"
아키히코가 물어서 "아무것도 아냐." 하고 고개를 저었다.
유사쿠는 멀리로 시선을 보냈다.
"해가 완전히 저물었네."
주위는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유사쿠는 양팔을 활짝 펴더니 "그럼 슬슬 가 볼까." 하고 말했다. 아키히코도 끄덕였다.
조금 걷다가 유사쿠는 멈춰 섰다. 그리고 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물어도 되냐."
"뭐냐."
"누가 먼저 태어났냐?"
그러자 어둠 속에서 아키히코가 조그맣게 웃더니, "너."하고, 조금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설 속에서 유사쿠와 아키히코는 끊임없이 엮이는 경쟁자이다. 그 과정 속에서 유사쿠는 항상 아키히코에게 진다고 생각한다. 유사쿠는 소설 전반적으로 아키히코에게 졌다, 는 생각과 표현을 자주 했으며,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이제는 익숙하면서도 체념했다는 듯이 "완패다." 라고 중얼거리고 만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유사쿠가 먼저 태어났다는 사실은 어쩐지 유사쿠에게 주어진 숙명은 항상 승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유사쿠는 항상 패배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항상 패배를 선택했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숙명은 짊어져야하는 것이 맞지만, 어떤 면에서는 숙명을 거스르는 일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 곤이는 착한 애니까요.

-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알고 있다. 곤이가 착한 아이라는 걸. 하지만 구체적으로 곤이에 대해 말하라면 그 애가 나를 때리고 아프게 했다는 것, 나비를 찢어 놓았다는 것, 선생에게 패악질을 부리고 아이들에게 물건을 집어 던졌다는 것밖에 말할 게 없다. 언어라는 건 그랬다. 이수와 곤이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거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 그냥, 알아요. 곤이는 좋은 애예요.

 

 내가 가장 감명깊게 읽은 구절이다. 우리의 언어는 어쩌면 족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대체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데까지만을 이해한다. 그리고 어쩔 땐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부분까지가 전부인 줄 안다. 그러나 한 마디 말들과 한 번의 행동들로 모든 것을 정의할 수 있을까. 백문이불여일견 이라는 말도 있듯이 어쩌면 말은 편협한 시각에 우리를 가두기도 한다.

 

 이 소설은 일반적으로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 외에도 많은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주인공처럼, 감정을 느끼지 못해도 "감정을 느끼는 척" 하는 방법들이 있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는 감정을 느낀다고 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곤이가 대체 어떤 앤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단지 아무도 곤이를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판단해버리곤 한다. 대체로는 잘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사실 관심도 없으면서 지나가다가 보게되면 무지성으로 한 마디 평가하곤 한다. 그렇다고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모른 채로 하는 만연한 평가 속에 살게 된다. 그렇다면 정말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소중히 생각하는 이 외의 말을 귀담아 듣거나 상처받을 필요가 있을까?

 이 책은 컴퓨터 구조 강의를 듣기 전에 "컴퓨터" 자체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싶어서 빌리게 된 책이다. 이 책은 이런 나의 목적에 부합하는 책이었다. 컴퓨터의 동작 원리에 대해서 깊고 복잡한 부분을 전부 알려준다기보다, 논리회로와 컴퓨터 내부구조, 정말 어떻게 동작하는 지에 대해서 논리 게이트부터 시작해서 운영체제에 이르기까지 유기적인 연결고리들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작은 단위부터 큰 단위로 순차적으로 이해하기에 적합한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다음에 설명하는 단어들의 의미와, 그 단어들간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고, 컴퓨터의 내부구조가 좀더 친근하고 쉽게 다가오게 된다. 컴퓨터 구조라는 과목을 배우는데 기초 근육을 기르게 해준다.

 

비트, 게이트, 비트 메모리, 바이트 메모리, 레지스터, 아스키코드, 버스 구조, 램, 2/8/16진수, 바이트 연산, 비트 시프트 연산, ALU, RAM, MAR

 

(내가 보려고 적는) 간단 정리

 컴퓨터는 가장 만들기 쉬운 NAND 게이트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NAND 게이트의 두 입력을 묶으면 NOT 게이트가 된다. 왠지 AND 게이트 두개로 NAND 를 만들것 같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다. NAND가 게이트 중 가장 기본단위이며, NAND 게이트 두개로 AND 게이트를 만든다. 이러한 NAND게이트 4개로 비트 메모리를 만들 수 있는데, 이는 레지스터의 기반이 된다. 요약하자면, 입력 i와 s가 있을 때 i는 말그대로 입력이 되고, s는 해당 입력을 수용할지 아닐지를 결정하는 부분이다. s=1 일 때는 상태 변경이 가능하고 s=0 일 때는 이전 상태를 유지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1비트 메모리를 8개가 모이면 바이트 메모리가 된다. 단 하나의 입력으로는 모든 것을 표현하기 힘드니 데이터의 묶음을 만든 것이고 그 묶음이 바이트인 것이다. 이때 AND 게이트 8개를 묶은 출력 제어기(enabler)를 바이트 메모리와 묶어주면 그것이 바로 레지스터가 된다. 또 이러한 레지스터들을 연결해준 형태를 버스라고 한다. 이러한 버스 형태로 컴퓨터는 데이터를 복사하는 형태로 데이터를 이동하게 된다.

비트 메모리 바이트 메모리
출력 제어기 레지스터

 

 

 

 이제 램을 알아볼 차례이다. 램은 이전 값이 어디를 참조했느냐에 따라서 속도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바이트 메모리에 무작위로 접근하고 싶을 때 유용하다 램(RAM)은 Random Access Memory 의 약자이며, 메모리에 접근하기 위한 MAR 은 Memory Address Register 메모리 주소 레지스터의 약자이다. 또한 램의 각 교차점에는 AND 게이트가 상주하고 있으며, 수많은 격자중에 단 한 부분만이 AND 게이트의 두 입력이 모두 1이 되어 인식을 하게 된다.

레지스터의 입출력 표기법 256byte 램의 구조
램의 교차점을 확대한 모습 램의 구조

 

 

 

 바이트 연산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 데, 하나는 하나의 레지스터에서 다른 레지스터로 바이트를 이동할 때 바이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 즉 '데이터'를 바꿀 수 있는 세 가지 연산이고 다른 하나는 바이트 데이터를 2개 입력해서 어떤 상호 작용을 거친 후 새로운 바이트를 출력할 수 있는 네가지 연산이다. 결국 바이트 단위로 할 수 있는 연산은 궁극적으로 총 일곱 가지 이며, 이는 컴퓨터가 실제로 바이트 단위의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하는 일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2를 곱하고 나누어서 자리수를 이동하는 개념의 비트 시프트 연산, NOT게이트 장치의 다른 말인 인버터(inverter),  속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아스키코드의 모든 대문자와 소문자는 세번째 비트 부호만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모든 알파벳 문자를 대문자로의 변환시에 쓰일 수 있는 AND장치, (AND장치와 비슷한 이유로) 알파벳 대문자를 소문자로 변환할 수 있는 OR장치, 입력된 두 값이 서로 같은지 판별하는 데에 쓰일 수 있는 XOR장치, 두 이진수를 더하는 장치인 가산기가 속한다. 또, XOR장치에서 좀더 발전한 비교기가 있는데, 이는 두 값이 같은지 다른지 다르다면 어느 값이 더 큰지를 출력한다. 그리고 모든 입력이 0인지 판별하는 제로 검사기도 있다.

1비트 비교기 바이트 비교기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살펴본 XOR, OR, AND, NOT, SHL(shift left), SHR(shift right), ADD 총 7가지 연산을 묶은 ALU(Arithmetic and Logic Unit) 산술 논리 장치로 다양한 연산을 수행한다.

ALU의 구조 op 코드

 

 이 책을 정말로 누워서 읽지는 않았지만, 지하철 안에라던가 가볍게 시간을 때울만한 짬이 났을 때 정말 가볍게 알고리즘을 읽기에 좋은 책이었다. 그렇다고 이 책 안에 있는 내용들이 결코 가볍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야기처럼 다양한 알고리즘들에 대해 풀어내는 형식이었다. 알고리즘은 흥미진진한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과 일맥상통하다. 또한 알고리즘을 개발한 다양한 천재들도, 그러한 관점에서 알고리즘을 접근했다는거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공대적인 유머를 하나씩 던지는데 그런 내용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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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3

 같은 팀 내에 비네이가 둘이 있는데, 하루는 비네이가 팀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냈다.

 

 Team, (팀원 여러분)

Vinay just called me and said he is off today because he didn't feel well.

(비네이가 방금 전화를 해서 말하기를 몸이 좋지 않아서 오늘 쉰다고 합니다.)

 Vinay(비네이)

 

 그래서 필자는 답장으로 보내면서 비네이에게 빨리 낫기를 바란다는 말을 한 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덧붙였다.

 

Your email is so recursive that I am worried about a stack overflow error.

(네 이메일은 너무나 재귀적이라서 스택 오버플로우 오류가 날까 걱정이 된다.)

팰린드롬 알고리즘

 팰린드롬이란 madam 과 같이 단어가 대칭적인 것을 말한다. 숫자의 경우 121, 4884 와 같은 숫자들을 말한다. 이 때의 이슈는 87과 같은 수를 팰린드롬의 수로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팰린드롬의 알고리즘은 다음과 같다.

 

원래의 수 와 원래의 수를 뒤집은 수를 더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87 + 78 = 165

165 + 561 = 726

726 + 627 = 1353

1353 + 3531 = 4884

그러면 최종적으로 4884 의 팰린드롬 수가 나오게 되었다!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수가 최종적으로 팰린드롬의 수가 될 것인가? 에 대한 이슈가 있다. 그 논란의 중심에 있는 수는 바로 196 이다. 많은 도전가들이 196을 이용해 팰린드롬의 숫자를 만들고자 노력했지만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다. 정말 팰린드롬의 수를 만족할 것인지의 여부는 196을 팰린드롬의 숫자가 되어야지만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또 196이 팰린드롬의 수를 만족하느냐의 여부는 딱히 중요치 않은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알고리즘의 세계는 호기심 많은 프로그래머들의 도전의 장이다.

 

둠즈데이 알고리즘

 자 이제 날짜가 주어지면 요일을 맞춰보는 일을 해보자. 그레고리력에 따르면, 4로 나누어떨어지면서 400으로도 나누어떨어져야 윤년을 만족한다. 이 때, 평년의 경우 2월 28일, 윤년의 경우 2월 29일을 둠즈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둠즈데이와 같은 요일을 가진 날들을 각각의 달마다 외워두면 요일을 계산하기 쉬워진다. 따라서 매달 둠즈데이는 다음과 같다.

4월 4일 6월 6일 8월 8일 10월 10일 12월 12일
9월 5일 5월 9일 7월 11일 11월 7일 3월 7일

 위 표에 해당되는 날짜들은 둠즈데이(2/28 혹은 2/29)의 요일과 같다. 이 때, 해가 바뀔 때마다 (1년이 지날 때마다) 둠즈데이의 요일이 한 칸씩 달라진다. 윤년의 경우에는 두 칸씩 달라진다. 2003년의 둠즈데이(2월28일)은 금요일이었다. 그렇다면 2004년의 둠즈데이는 토요일이다. 이러한 계산을 빠르게 하기 위해서 콘웨이의 리스트와 같은 암기 리스트도 생겨났다. 6, 11.5, 17, 23, 28, 34, 39.5, 45, 51, 56, 62, 67.5, 73, 79, 84, 90, 95.5 이 리스트의 의미는 19**년도 라고 했을 때 **에 오는 숫자들의 나열이다. 이 리스트에 있는 년도의 둠즈데이는 모두 수요일이다. 이때 11.5의 경우는 1911은 화요일, 1912는 목요일이라는 의미이다. 

 이제 1998.02.04 의 요일은 언제였는지 계산해보자. 콘웨이 리스트에 따르면 1996년도의 둠즈데이는 목요일이므로 1998년도의 둠즈데이는 토요일이다. 2/28(토) 이고 7*4=28 이므로 1월 31일의 요일또한 토요일이다. 2/1(일) 2/2(월) 2/3(화) 2/4(수) 따라서 1998.02.04 는 수요일이다. (안궁금할지 모르지만 진오의 생일이다.)

다음은 미래의 년도에 대해서 요일을 계산할 때 유용한 달력이다.

 

사운덱스 알고리즘

 영어이름을 관리하기 위한 알고리즘으로 2차 세계 대전 때 미국 군인들의 개인 기록을 관리하는 데 사용 되었고, 1880년에서 1930년에 이르기까지 인구 통계 조사에도 사용되었으며 오늘날 여러 가지 소프트웨어의 철자 확인기 엔진 속에도 포함되어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사운덱스 알고리즘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단계 1] 이름의 첫 번째 글자를 저장하고, 첫 번째 글자를 제외한 나머지 글자 중에서 a, e, h, i, o, u, w, y를 모두 제거한다. 

[단계 2] 이름 안에 존재하는 글자들에 다음과 같은 번호를 부여한다.

b, f, p, v --- 1

c, g, j, k, q, s, x, z --- 2

d, t --- 3

l --- 4

m, n --- 5

r --- 6

[단계 3] 원래 이름에서 서로 인접하여 연속으로 나타나는 글자는 맨 앞에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제거한다.

[단계 4] 최종적인 결과를 '글자, 숫자, 숫자, 숫자' 의 형태로 맞추기 위해서 숫자가 세 개 이상이면 나머지는 생략하고, 세 개 미만이면 뒤에 0을 붙여서 형태를 맞춘다.

 

Jinno 라는 이름을 사운덱스 알고리즘에 대한 입력으로 만들어보자. 단계 1에 의해서 jnn만 남는다. 그리고 나머지 과정을 수행하면 최종적으로 J500이 된다.

 

메르센느 소수

수학자 메르센느는 하나의 식으로 모든 소수들을 구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수가 해당 식을 맞는 듯해보였지만, 이윽고 속속들이 만족하지 않는 소수들이 발견되었다. 계속해서 예외사항이 발생하고 if-else 구문으로 얼룩지자, 사람들은 그것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알고리즘으로 탄생시켰다.

" p가 소수일 때 2^(p-1)이 소수면, 그것은 메르센느 소수라고 한다. "

 

다음 사이트는 최대의 메르센느 소수를 찾기위한 탐험적인 프로그래머들의 웹 페이지이다.

https://www.mersenne.org/

 

Great Internet Mersenne Prime Search - PrimeNet

GIMPS 2019 fundraiser (updated) GIMPS is a victim of its own success! In 2008, after claiming the EFF award for discovery of the first 10 million digit prime, GIMPS had about $25,000 cash on hand to fund server hardware, ISP fees, and $3000 awards for disc

www.mersenne.org

 

 

유클리드 알고리즘

 두 자연수 m과 n이 주어졌다고 하자.(m>n) 이 때, m과 n 사이의 최대공약수를 구하는 것이 바로 유클리드 알고리즘이다. 이 알고리즘은 다음과 같다.

[단계 1] m을 n으로 나눈다. 나머지를 r이라고 한다.

[단계 2] 나머지 r이 0이면 n이 최대공약수이다. 나머지가 0이 아니면 m의 값을 n으로 설정하고, n의 값을 r로 설정한 다음 [단계 1]로 되돌아가서 반복한다.

 

582 = 129 * 4 + 66

129 = 66 * 1 + 63

66 = 63 * 1 + 3

63 = 3 * 21 + 0

따라서 582 와 129 사이의 최대공약수는 3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들었던 생각은, 결국 100% 설득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좋은 설득법이라고 하더라도 80%를 넘기기는 힘들다. 그러니까, 결국 확률의 싸움이다. 그리고 그 확률이라는 것은 가능성이 99%이더라도 운나쁘게 1%에 걸릴 가능성 또한 충분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 의미없는 일이라는 말은 아니다. 어짜피 인생의 대부분은 확률 싸움이기 때문이다. 여기 나온 기술을 사용해서 잘 적용되지 않더라도 낙담하지는 말라는 이야기이다.

이 책은 타인을 설득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대체로 마케팅에서의, 그러나 그것이 곧 전부를 설명하는) 전략들을 설명한다. 그러나 내게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 기술들을 바로 '나 자신'에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항상 습관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고, 아침에 일찍일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잘 되지 않는다. 매번 다짐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설득의 기술을 이용해서 내 인생을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는 장치들을 설치해서, 성공 확률을 높이는 것도 멋진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바로 내가 나를 설득하고 원하는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나는 내 삶, 내 습관, 내 행동을 바람직한 방식으로 유도하기 위한 인생 해킹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책을 읽었다.

그러나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이다. 여기에 나온 전략들 중 어느정도의 부분은 이미 내가 무의식적으로 실행 중인 것들도 많았다. 결국 핵심은 "유도"일 뿐이며 "결정"되는 것은 아닌 셈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며 진정으로 설득의 기술을 연마해서 설득 왕이 되었다기보다, 내가 왜 그 터무니 없는 설득에 넘어갔었으며 왜 그렇게 유도당했었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받는 데에서는 상당히 유익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설득하고 유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 설득은 내 관점에서 쓰여진 설득이다. 타인의 관점에서는 그 설득이 또 특수한 경험들과 합쳐져서 정확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보편적으로 동의할 만한 설득의 기술을 나열해놓아져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개개인별로 가치관과 주의를 두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설득의 기술이더라도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경우도 분명 (적지 않게)있기 때문에, 타인을 움직이는 일은 참 어려운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게 된 생각이 바로 이것이다. 결국 내가 가장 잘 설득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책에 나온 이야기들은 상당히 유용하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그 선택 이전에
우리가 어디에 주의를 두는지에 좌우된다.

 이 책의 첫 장을 읽은 순간 들었던 생각은, "내가 이 책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렇게 헤맸었던 거였어." 였다.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 (특히, <희망버리기 기술> 등) 그리고 지금껏 살아오면서 들어왔던 조언들, 그 중에는 이해가 온전히 되지 않는 의문들이 참 많았다. 이성적으로 맞는건 알겠는데,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혹은 실천이 되지 않는 일들에 대한 궁금증들. 난 이제 알았다. 모든 것은 내가 용기를 내지 않았던 것이다.

 

 아들러의 목적론은 그동안 나의 이해되지 않았던 행동, 감정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모든 것은 다 핑계였을 뿐이다. 어떠한 감정을 느낄 때 그것을 인과적으로 바라본다면, 그 감정은 결정되어 버린다. 혹은 현재의 나의 행동이 과거에 의한 것이라면 내 지금 행동은 결정되어 버린다. 그러나 내가 이 행동을 하고 싶어서 과거의 그 일, 혹은 감정을 끌어다가 원인이라고 치부하고 있는 것이라면? 결정론의 관점이 아닌 목적론의 관점에서는, 내 감정과 행동에 대한 결정권은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에게 달려있다. 그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나의 과제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럼으로써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변할 수 있다. !!

 

 현재에 집중하라.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는 이야기는 어떤 명상을 하더라도 어떤 심리학책을 읽더라도 혹은 누군가에게 철학적 조언을 듣더라도 항상 나오는 조언이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으로는 그 의견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실천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유를 온전히 깨닫게 되었다. 인생은 인과관계로 이루어져있지않다. 오히려 찰나의 연속일 뿐이다. 그러니까 현재에 집중하라. 인생은 단계별 혹은 직진코스로 짜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을 춤추듯이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제를 분리하라. 타인의 머릿 속은 너의 과제가 아니다. 또 눈치를 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이일 수록 오히려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타인은 나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닌데, 모든 타인들의 내 맘에 들게 행동하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왕자 혹은 공주님에게만 일어난다. 결국 내 생의 마감 순간까지도 타인의 마음 속은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조건적인 신뢰이다. 배신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설사 사실이 아닌 증거일지라도 그 배신의 증거를 찾는 데에만 혈안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만약 배신당한다고 해도 배신당한 이후에 슬퍼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배신을 할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나의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과제이고 믿을지 말지 결정하는 것이 바로 나의 과제이다. 끊임없이 의심하며 살겠는가? 나는 내 친구들을 그저 믿어보겠다.

 

 나는 가히 심리학책 수십권보다 이 책 한권이 더 울림을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과거에 나는 이 책은 당연한 이야기만 줄줄히 써놓은 그저 마음의 위안만을 위한 마취제같은 책일 것이다,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누군가 추천해준 책을 읽다가 심리학 책을 읽기 시작하게 되고, 그렇게 아들러를 알게 되었고, 수 권의 책을 읽다가 결국 이 책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 과정들을 겪으면서 나는 모든 과정에서 그 순간 최선을 다했고 춤을 추듯이 내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다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확신할 수 없지만, 이제는 그 때 인생을 방황하면서 던졌던 수많은 질문들에 대해 어느정도는 답을 찾은 기분이 든다.

 한 번 의식을 시작하게 되면 그것을 멈출 수 없다. 만약 쥐죽은 듯이 조용한 도서관 한 복판에서 어떻게 침을 삼키는지 의식하기 시작하면, 침 삼키는 소리가 마이크에 대고 말하는 것 만큼 크게 느껴지고 어색해져버린다. 나의 문제는 이것이었다. 내 존재가, 왜 이렇게 어색하지?

 

 이 책을 읽고 난 후, 어느정도 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나는 내 '당연히(should)' 목록에 있는 내 신념들을 계속해서 무시당했고, 아니 무시당했다고 느꼈었고 그렇게 내 강점을 잃고 있었다. 또 그 염원은 좌절당할 것이라고 느끼고 일찍이부터 포기해버리는 것을,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치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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