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과 관계에 깊이에 대해 표현하는 방식이 정말 마음에 들었던 책이다. 이 책은 세상을 증오하면서도 그 세상을 재건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그 과정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마을에 대한 추억과 사랑의 정도, 사람들간의 유대, 또 (보통) 두 인물들간의 감정적 유대에 대해 묘사하는 부분들이 나중에 언젠가 또 다시 읽고 싶은 책이었다. 소설 속에서는 책 제목인 '지구 끝의 온실' 이라는 이야기가 발간되었다고 했다. 이런 부분들은 마치 독자인 내가 책 속 세계관에 들어가서 그 세계관의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잡지로 읽는 듯한 기분이 들게했다. 또 식물에 대해 엮어낸 이야기도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 부분도 많았지만) 상당히 흥미로웠다.

 

 

 

 

 

이 다음 내용은 내가 기록해두고 싶은 책 속 구절들이다.

 

 

(두 사람간의 관계들에 대한 부분들)

 

(아마라&나오미)

 아마라는 이제 말을 하는 대신 화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고 나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아마라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침착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돌핀이 폐허를 빠져나왔을 때, 아마라가 조종 장치를 붙잡은 채 울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죽은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려고 했다. 그들이 내게 해준 말도 기억하려고 했다. 아무것에도 마음 붙이지 말고 그냥 어디로든 도망치라고. 그러다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땐 정말로 죽는거라고. 마지막으로 그 이름들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타티야나, 마오, 스테이시, 그리고 ······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는 다 잊어버릴 이름들이었다.

*

 나는 아마라가 나를 떠나버릴까봐 두려웠다. 이 끔찍한 세계에서 아마라마저 없다면 나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아마라는 자신이 내 발목을 붙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아마라가 작은 배낭을 메고 새벽에 조용히 나가는 걸 붙잡은 적도 있었다.

 "어디 가?"

 내가 한참이나 아마라를 노려본 끝에야 아마라는 다시 침대로 와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마라가 아침까지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거친 숨소리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지수 & 레이첼)

 그리고는 지수 씨가 손을 뻗어 내 곱슬머리를 잔뜩 헤집어놓았다. 그때 지수 씨가 나에게 보내던 다정한 시선은, 그가 레이첼과 대화를 나눌 때는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것이었다. 지수 씨는 레이첼을 볼 때면, 무언가 홀린 것 같으면서도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표정을 자주 지었다. 그 자리에서 도망쳐 사라지고 싶은 것처럼.

 그 표정을 보면서, 나는 막연히 생각했다. 나에게 좋은 사람이 타인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고. 어쩌면 지수 씨가, 나와 레이첼에게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

지수는 그런 레이첼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그의 사고와 내면과 감정이 궁금했다. 그가 설령 지수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다고 해도, 그럼에도 살아 있는 한 지수를 필요로 할 것이라는 사실에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시간이 지날수록 레이첼의 신체 구조는 유기체와 기계가 복잡하게 엉긴 형태로 변해갔다. 보통의 정비사라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곤란함을 느꼈겠지만, 지수는 눈을 감고 그려볼 수 있을 만큼 레이첼의 몸에 익숙해졌다. 이 마을 전체가 의존하고 있는 레이첼은 오로지 지수에게만 의존하는 사이보그였다. 레이첼은 지수의 소유가 아니지만 지수를 결코 떠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식물들과 온실과 자신의 신체를 유지하기를 원하니 앞으로도 지수가 필요할 것이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 외에는 침묵만이 가득한 온실에서 숨을 죽이고 핀셋 끝을 들여다보는 레이첼. 아주 작은 표본 하나에 오랫동안 시선이 머무르는 레이첼. 그런 레이첼을 유리창 너머로 보고 있으면 지수의 숨도 멈출 것 같았다. 그러다 레이첼과 눈이 마주치면 그 꿰뚫는 듯한 시선이 지수의 비밀스러운 생각을, 레이첼에 대한 집요한 호기심을 낱낱히 읽어내는 것 같았다.

*

지수가 처음에 느긴 감정은 의아함이었다. 그건 이미 예전에 다 끝난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온실은 어짜피 유지될 수 없다는 것, 이곳을 떠나도 지수는 정비사로서 레이첼을 따라가리라는것, 그가 지수를 필요로 하는 동안, 당분간은. 그것이 거래였으니까······

 하지만 레이첼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았을 때, 그리고 얼마 전 그가 말한 감정적 끌림을 떠올렸을 때, 문제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지수는 깨달았다. 그렇게 애원해도 숲 밖으로 식물들이 나갈 수 없었던 이유, 레이첼이 알면서도 숨겨온 이유를.

*

 "아주 오랫동안 그를 생각했어요. 지수가 정말로 나의 기계 뇌에 그런 짓을 했는지, 아니면 그냥 둘러댄 말이었는지, 만약 그게 진실이라고 해도, 그게 그렇게까지 잘못된 일이었는지. 대체 마음은 언제 어디서 시작되는지. 지수와의 대화를 떠올리고, 그것을 곱씹고, 다시 절망하기를 반복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오랜 시간 그를 잊을 수 없다면······ 나의 감정은 그 자체로 진실한 것이 아닌지 생각했지요."

*

 "맞아요. 그건 핑계에 가까웠습니다. 지수가 나를 되살렸을 때, 나는 그에게 호기심이 생겼던 거예요. 그게 진짜 이유였죠. 다시 죽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지수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고 신경이 쓰였어요. 자신도 인류를 구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으면서, 차라리 세상이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저에게는 구원자가 될 것을 요구하는 뻔뻔함이 흥미로웠죠. 그를 지켜보고 싶었어요. 생각해보면 저의 호기심도, 지수가 제게 가졌던 것과 근본적으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내면을 평생 궁금해하기만 하다 끝나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

"지수 씨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을 알아요. 할 수만 있다면 온실을 다시 찾아가려고 했을 텐데, 그러지는 못했나봐요. 당신도 그곳에 가볼 수 있을 거예요. 어쩌면 당신에게 남긴 말도 다시······"

 아영은 레이첼의 표정을 보고 말을 멈췄다.

 "레이첼, 괜찮아요?"

 레이첼은 이제 울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마치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과 마음이 그의 일그러진 표정 위에 있었다. 아영은 레이첼을 위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

 레이첼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날, 아영은 그에게 지수의 기억 칩을 건네주었다. 레이첼은 지도의 좌표를 건넸다. 어디라고 말해주지는 않았는데도 아영은 그곳이 어디인지 이미 알 것 같았다. 레이첼에게 가보지 않아도 괜찮겠냐고 물으려다가, 아영은 그의 얼굴에 떠오른 흐릿한 표정을 보았다. 이미 그가 그곳에 몇 번이고 가보았으리라는 것을, 아영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살인을 하기도, 신비감을 주기도, 생명을 살려주기도, 누군가들의 추억이 되기도 하는 모스바나)

 밖으로 나온 밀리어가 바닥에 떨어진 잎을 주웠다. 며칠 전 심었던 덩쿨식물의 갈퀴 모양 잎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밀리어를 향했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목격하고 있었다.

 살아남은 마을과, 살아남은 식물, 그것 사이의 연관성을.

 밀리어가 덩굴 잎을 들어올렸다. 잎에서 푸른 먼지가 떨어져 흩날렸다.

 "우릴 구했어요. 이 식물이······"

*

 더스트 폭풍에 살아남으려면 덩굴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덩굴은 사람들을 굶주리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아름다워 보였던 푸른 먼지는 이제 고통의 근원처럼 느껴졌다. 내성이 약한 사람들에게 자진해서 마을을 떠나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생겼다. 지수 씨가 한 번만 더 그런 말을 대놓고 했다간 가만두지 않을거라고 화를 내자 다툼은 잠잠해졌지만, 한번 싹튼 불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라는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

 "여러 번 시험해봤지만 응집이나 제거 현상과는 무관하게 나타나. 개량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이었어. 중립적인, 불필요한 돌연변이. 아마도 비료에서 발생하는 아산화질소와 반응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공기중의 특정 분자와 반응해서 발광성 부산물이 생성돼. 그게 흙이나 먼지 입자에 달라붙지. 간단한 유전자 조작으로 특성을 없앨 수 있어. 쓸데없이 시선을 끄는 특징이니까 제거할 생각이야."

 "그렇구나. 불필요한 돌연변이라니······"

 불을 켤 생각도 않고, 지수는 한참이나 상자 속의 푸른 빛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아름답네."

 그렇게 말하는 지수를 레이첼이 불끄러미 보고 있었다.

*

 지수는 밤새도록 바위에 앉아서, 숲을 가득 채운 푸른 먼지들을 보았다. 아름다움 외에는 아무 기능이 없는, 그러나 결국 제거되지 않은 푸른빛들을.

 

 

 

(프림빌리지, 애착과 이별)

 뭐가 옳은 건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세계를 말하는 것이 이상했다. 프림 빌리지 바깥의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인류 전체의 재건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만큼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버려졌다. 그들은 우리를 착취하고 내팽개쳤다. 그 사실만은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버려진 우리가 세계를 재건해야 할까.

*

 "돔을 없애는 거야. 그냥 모두가 밖에서 살아가게 하는 거지. 불완전한 채로. 그럼 그게 진짜 대안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 똑같은 문제가 다시 생길 거야.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 뭔가를 해야 해. 현상 유지란 없어. 예정된 종말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을 계속해서 벌이는 것 자체가 우리를 그나마 나은 곳으로 이동시키는 거야."

 나는 지수 씨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돔을 어떻게 없앤다는 것인지, 그 밖에서 어떻게 모두가 살아간다는 것인지······

 "하지만 프림 빌리지는 무너지지 않았어요. 여기도 대안이잖아요. 레이첼의 식물들이 있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안전할 거예요. 외부로부터의 공격은 맞서면 되고요. 저도 같이 싸울 거예요."

 내 말에 지수 씨는 침묵했다. 나는 절박한 심정이 되어 말했다.

*

 아마라와 대니가 호들갑을 떠는 동안, 나는 이상하게도 지수씨의 시선이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수 씨가 이 순간을 눈앞에 두고도 그리워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내 짐작일 뿐이었지만, 나는 그런 지수 씨가 자꾸 신경쓰였다.

*

 나는 지수 씨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꾸 이곳을 떠나는 상황을 가정했던 이유도, 나에게 분해제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 이유도 이제 알 것 같았다. 지수 씨는 이 풍경을 보면서 동시에 이 풍경의 끝을 상상하고 있었다.

 사실은 나도 짐작하고 있었다. 프림 빌리지는 영원하지 않을거라는 걸. 그렇지만 이곳에 남겠다고 거듭 말하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곤 했다.

*

 하루는 그림을 찢어버리겠다고 날뛰다가, 아마라가 말리고 토닥여서 겨우 진정한 다음에는 그림을 구겨서 구석에 던져두었다. 하루는 엉엉 울다가 대니를 욕하고, 또 지쳐 쓰러져 있다가 다시 대니를 욕하기 시작했다. 아마라가 하루를 달래는 것을 나는 지켜보았다.

 "대니는 자신의 방식을 원했던 거야. 우리랑 의견이 달랐지. 그러니까 이 마을이 지속될 수 있느냐는 것에 대해서 말이야."

*

 지수는 침입자들의 추적을 막기 위해 시간 차를 두고 다른 방향으로 사람들을 보냈다. 그들 중 일부는 밖에서 합류에 성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다른 프림 빌리지를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프림 빌리지는 분열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서서히 무너졌다. 아니, 처음부터 그 끝은 예정되어 있었다. 영원한 도피처는 없다. 이곳에서 함께했던 사람들의 시공간은 다시 겹쳐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약속하고 있었다. 이 숲을 나가도 레이첼의 식물들을 심겠다고. 숲 바깥 세계에서 가능성을 찾아보겠다고. 프림 빌리지를 만들겠다고. 그러니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지수는 그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면서, 손을 잡고 안으면서,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바라왔는지를 알았다. 지수야말로 프림 빌리지를 끝까지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 세계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랐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

 "시간이 흐를수록, 모스바나가 무엇인지가 제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에요. 저는 그냥 그곳에서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던 거예요. 프림 빌리지를 다시 만들 수 없다는 것도, 그런 곳은 오직 프림 빌리지뿐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식물들을 심었어요. 오직 그것만이 저를 살아가게 했으니까요."

*

 점들은 서로 다른 대륙에, 각각의 나라에 찍혔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출발해서 세계 곳곳으로 향하는 선이 이어졌다.

 "한 명이 아니었어요. 한 장소도 아니었죠. 온실에서 떠난 이들이 거의 같은 시대에 각자 도착한 곳에서 모스바나를 기르기 시작했어요. 여기가 나오미와 아마라, 당신들이 도착한 지점이죠. 그리고 여기는 중국 남부 지역이고요. 또 여기는 독일이고, 이렇게 점으로부터 퍼져 나간 선을 전부 그어보면······ 거의 세계의 전 대륙에 최초의 모스바나들이 심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래서 모스바나들이 그렇게 단기간에 지구를 뒤덮을 수 있었던 것이죠."

 아영은 자신이 이 논문의 데이터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어떤 놀라움과 슬픔,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을 나오미도 만나게 되기를 바랐다. 아영은 나오미가 지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오미의 표정이 점차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오미가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만이 아니었군요. 모두가 잊지 않았어요."

 "맞아요. 당신들이 약속을 지켰고, 세계를 구한 거예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그곳을 떠나서도 프림 빌리지를 재현하려고 했을 뿐이에요. 결국은 그러지 못했지요. 그러지 못했는데······"

 나오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지도 위의 점들이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아영은 설명을 멈추었다. 이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나오미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점들의 이름을.

 

 

 

(그 외)

 - 내가 말했지? 못 찾겠으면 얼른 돌아와. 해결책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니까.

 아영은 내용을 읽고 피식 웃었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문제를 푸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고, 목적지로 가는 길도 여러 경로가 있다. 그렇지만 굳이 온유에 이렇게 찾아온 것은 이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아영은 이 문제를 푸는 일이 과학자로서의 호기심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감정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영은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한, 신비로운 과거를 가지고 있지만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버린 한 사람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 그리고 그리움. 지금 시점에서 이희수를 찾는 까닭은 그것이 최적의 해결책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영의 마음이 이끌리는 곳이 바로 그 길이기 때문이었다.

*

 지수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이런 광경을 보아왔기에, 이 공동체의 끝이 어떻게 될지도 알고 있었다. 아마 저러다 몇은 죽고, 몇은 돔 시티로 갔다가 도로 쫓겨나고, 몇은 대피소에 거금을 주고 들어가겠지. 배신감을 느낀 사람들이 서로를 고발하고 죽일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시시한 결말이었다. 공동체가 처음에 내건 기치가 얼마나 거창하고 아름다운지에 관계없이 다들 그랬다.

 

"그렇지만 이상하지 않냐. 너는 희생자 쪽 사람이잖아. 그런 네가 속죄를 해야 하다니."
유사쿠가 말하자, 아키히코는 뭔가 눈부신 것이라도 보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게 어떤 피가 흐르는지는 관계없어. 중요한 건 내게 어떤 숙명이 주어졌는가야."
"숙명."
그 말은 유사쿠의 머릿속 저 밑에서 울렸다. 동시에 조금 전 우류 가에 입양된 아키히코를 질투한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 숙명을 위해 아이다움을 잃고, 인생의 대부분을 희생해야 하는 처지를 어떻게 부러워할 수 있을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이를 테면 태생이나 성별, 부모님 혹은 가정 환경등이 그렇다. 모두 내 선택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을 내 선택도 아닌데 왜 짊어져야 하느냐며 불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인만큼 짊어져야만 하는 부분인 것이다. 그런 것들은 거부권따위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게 숙명이 아닐까. 인생은 물론 나의 선택의 연속으로 꾸려지기도 하지만, 이런 보이지 않는 실로 짜여져 있는 듯한 숙명같은 부분도 있다. 이런 것들은 온전히 나의 몫이고 어찌됐건 짊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청혼을 받아들였다. 딱히 무엇이 결정타가 된 건 아니다. 한마디로는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막연하지만 받아들이는 편이 좋겠다는 방향으로 굳어졌다. 그 요인 중에는 연애와 결혼은 별개라고 주장하는 친구의 권유와 말은 하지 않지만 미사코가 청혼을 받아들이길 바라는 부모님, 그리고 세속적인 통념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최종적인 그녀의 심경을 되도록 적확하게 표현한다면 '거절할 만한 이유가 없어서.'일 것이다.
미사코는 모두에게 말했다. 신데렐라가 될 거라고.

거절할 만한 이유가 없어서, 흘러가는 데로 살다보니, 여기에 다다랐다. 이런 것도 숙명에 한 부분인 것일까. 사실 인생에 있어서 선택을 할 때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 선택하기보다 어쩌다보니, 그냥, 그 선택을 하지 않으면 이상해서, 그런 선택을 하는 순간들이 더 많다. 찰나의 가벼운 이유이지만 그 찰나가 앞으로의 미래를 결정한다면 그것도 숙명인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은 것 같다.


"미사코에게 마음을 열고 싶었다. 간절히 그러길 바랐어.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런 마음이 더 커져 갔어.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되면 비밀을 계속 지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어. 다 얘기하고 후련하게 지내고 싶지 않을까 두려웠어. 방문을 열쇠로 잠그는 것은 미사코가 들어올까 봐서가 아니라 내가 미사코에게로 도망치는 걸 막기 위해서였어."
"마음의 열쇠인가······."
"그런데 감성이 예민한 미사코는 그런 부자연스러움을 바로 알아차린 것 같아. 나로서는 완전히 체념했지.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었어."

누구에게나 주어진 숙명처럼, 누구나 하나씩은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가 있는 것 같다. 그 숙제도 어떻게보면 숙명의 한 부분이며,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아니면 해결하지 않을 것인지는 본인의 선택이지만 그러한 숙제가 주어졌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살아가면서 풀어가야 하는 숙명의 일부분인 것 같다. 아키히코의 경우 그 문제를 풀어가지 못하는 기간이 길수록 진실의 무게도 점점 더 무거워졌고 그 기간과 무게만큼 미사코와의 관계도 부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유사쿠는 좀 전에 만난 미사코를 떠올렸다. 그녀가 우류 가로 돌아간 것은 아키히코의 결의를 느껴서일 것이다. 어딘가 빛이나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유사쿠는 두 번 다시 그녀의 마음이 자기한테 향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완패다."
유사쿠는 중얼거렸다.
"응?"
아키히코가 물어서 "아무것도 아냐." 하고 고개를 저었다.
유사쿠는 멀리로 시선을 보냈다.
"해가 완전히 저물었네."
주위는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유사쿠는 양팔을 활짝 펴더니 "그럼 슬슬 가 볼까." 하고 말했다. 아키히코도 끄덕였다.
조금 걷다가 유사쿠는 멈춰 섰다. 그리고 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물어도 되냐."
"뭐냐."
"누가 먼저 태어났냐?"
그러자 어둠 속에서 아키히코가 조그맣게 웃더니, "너."하고, 조금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설 속에서 유사쿠와 아키히코는 끊임없이 엮이는 경쟁자이다. 그 과정 속에서 유사쿠는 항상 아키히코에게 진다고 생각한다. 유사쿠는 소설 전반적으로 아키히코에게 졌다, 는 생각과 표현을 자주 했으며,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이제는 익숙하면서도 체념했다는 듯이 "완패다." 라고 중얼거리고 만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유사쿠가 먼저 태어났다는 사실은 어쩐지 유사쿠에게 주어진 숙명은 항상 승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유사쿠는 항상 패배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항상 패배를 선택했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숙명은 짊어져야하는 것이 맞지만, 어떤 면에서는 숙명을 거스르는 일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 곤이는 착한 애니까요.

-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알고 있다. 곤이가 착한 아이라는 걸. 하지만 구체적으로 곤이에 대해 말하라면 그 애가 나를 때리고 아프게 했다는 것, 나비를 찢어 놓았다는 것, 선생에게 패악질을 부리고 아이들에게 물건을 집어 던졌다는 것밖에 말할 게 없다. 언어라는 건 그랬다. 이수와 곤이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거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 그냥, 알아요. 곤이는 좋은 애예요.

 

 내가 가장 감명깊게 읽은 구절이다. 우리의 언어는 어쩌면 족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대체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데까지만을 이해한다. 그리고 어쩔 땐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부분까지가 전부인 줄 안다. 그러나 한 마디 말들과 한 번의 행동들로 모든 것을 정의할 수 있을까. 백문이불여일견 이라는 말도 있듯이 어쩌면 말은 편협한 시각에 우리를 가두기도 한다.

 

 이 소설은 일반적으로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 외에도 많은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주인공처럼, 감정을 느끼지 못해도 "감정을 느끼는 척" 하는 방법들이 있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는 감정을 느낀다고 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곤이가 대체 어떤 앤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단지 아무도 곤이를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판단해버리곤 한다. 대체로는 잘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사실 관심도 없으면서 지나가다가 보게되면 무지성으로 한 마디 평가하곤 한다. 그렇다고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모른 채로 하는 만연한 평가 속에 살게 된다. 그렇다면 정말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소중히 생각하는 이 외의 말을 귀담아 듣거나 상처받을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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