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의식을 시작하게 되면 그것을 멈출 수 없다. 만약 쥐죽은 듯이 조용한 도서관 한 복판에서 어떻게 침을 삼키는지 의식하기 시작하면, 침 삼키는 소리가 마이크에 대고 말하는 것 만큼 크게 느껴지고 어색해져버린다. 나의 문제는 이것이었다. 내 존재가, 왜 이렇게 어색하지?
이 책을 읽고 난 후, 어느정도 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나는 내 '당연히(should)' 목록에 있는 내 신념들을 계속해서 무시당했고, 아니 무시당했다고 느꼈었고 그렇게 내 강점을 잃고 있었다. 또 그 염원은 좌절당할 것이라고 느끼고 일찍이부터 포기해버리는 것을,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치부해버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점은, 명상과 마음챙김 그리고 현재에 집중하는 것, 더 나은 삶을 사는 법, 걱정을 줄이는 법, 업무 효율을 높히고 몰입하는 것 이 모두가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괴롭거나 죄책감, 걱정은 들지 않고 또 그럴 여유도 없다. 최근 나는 마음이 상당히 괴로웠다. 그 이유는 인생의 방황기였다고나 할까. 과거의 나에 대한 죄책감, 현재의 나에 대한 회의감, 미래의 나에 대한 걱정들이 마구 쏟아져서 제대로 일에 집중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그렇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은 어딘가에 집중하기도 어렵다. 또한 몰입과 마음챙김, 우울증은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심리학 카테고리에 넣게 되었다.
핵심은 매순간 자각하고 의식하는 것이다. 메타인지라는 용어는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깨닫는 것을 말한다. 특히나 자동 조종 모드에 들어가게 될 때 더욱 주의깊게 자각해야 된다. 즉 나도 모르게 SNS를 자꾸만 켜고, 유투브를 의미 없이 열게 되는 행위들은 무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하게 된다. 또 이러한 비생산적인 일들은 의미없는 일에 시간을 많이 낭비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이 무엇으로 가득차있는지 매순간 의식해야 하며, 의도적으로 생산적인 일에 집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는 우리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것들 또한 차단해야 하며, 구체적으로 계획과 목표를 설정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이 책은 이러한 "몰입의 기술"에 대해서 설명한다.
하이퍼포커스 상태에 들어가면 개인적인 관계, 대화, 그 밖의 상황을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다. 서로에게 충실하게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침례교 목사이자 작가인 데이비드 옥스버거가 말했듯, '이야기를 들어주는 행위가 사랑하는 행위와 얼마나 비슷하냐면, 보통 사람은 그 둘을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다.'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집중 상태의 질은 삶의 질을 결정한다. 직장에서는 당면한 것에 더 주의를 기울일수록 더 생산적인 사람이 된다. 집에서는 당면한 것에 더 주의를 기울일수록 삶이 더 의미깊어진다.
또한 이 책에서 특이했던 점은, 1부 하이퍼포커스에 대한 챕터가 끝나고 나면 2부 스캐터포커스에 대한 챕터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집중하라고 해놓고서 "의도적으로 정신을 분산시키"라니? 하지만 핵심은 "의도적"으로 집중을 분산시키는 데에 있었다. 내가 어떤 생각으로 마음이 방황하고 있는지를 되도록이면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에 집중할지 "선택"할 수 있게 되고 그 선택은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이러한 스캐터포커스는 창의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포획 방식, 문제 더듬기 방식, 습관적인 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나 어려워서 끝내지 못한 작업들에 대해 불현듯 해답이 생각나곤 하는 것 말이다.
끝나지 않은 업무와 과제는 끝낸 업무보다 더 무겁게 마음을 짓누른다. 그러나 정말 집중하려면 이렇게 주의를 흐트러뜨리는 개회로를 닫아야 한다. 우리는 완료한 일보다 진행 중인 일을 더 잘 기억하기 때문이다. 심리학계에서는 이 현상을 자이가르닉 효과라고 부르는데, 이 개념을 처음으로 연구했던 블루마 자이가르닉의 이름을 땄다. 집중하려고 할 때는 자이가르닉 효과가 성가실 수도 있찌만, 주의를 분산시킬 때는 그 반대다. 사실 자이가르닉 효과 덕분에 우리는 품고 있는 문제에 관해 놀라운 통찰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여러분은 아마 깨달음의 순간을 이미 몇 번 경험해봤을 것이다. 아침 식사 준비를 하거나, 편지를 받거나, 미술관을 둘러보다가 그 순간을 맞이했을 수도 있다. 두뇌는 지난 몇 시간 동안 생각지 않던 문제의 답을 갑자기 예기치 못하게 찾았을 것이다. 그 순간 퍼즐 조각은 아주 매끄럽게 모여 제자리에 맞아 들어갔다.
p272
동시에, 몰랐던 사실에 관한 점을 습득하는 것 역시 무척 가치 있는 일이다. 새로운 자료를 얻으면 본인이 가진 기존의 믿음을 공고히 하는 정보만 받아들였던 것은 아닌지 자문할 기회가 생기며, 이를 계기로 통찰을 얻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뇌는 새로운 정보에 끌리며 그 정보를 기억하도록 회로가 연결되어 있다.
무언가를 습득하는 데 의구심이 든다면 자문해 보자. 그 정보 조각을 얻으면 삶이 어떻게 달라지리라고 생각하나? 이 책에 나온 전략은 모두 주의력을 의도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돕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 원칙을 적용하자. 창의력이 연결한 점의 총합이나 다름없다고 할 때, 자동조종 상태로 정보를 습득하는 것은 가장 비효율적인 활동이다.
점검을 시작하려면 습득한 정보를 네 가지 범주 중 하나에 할당 해야 한다. 유용한 것, 균형 잡힌 것, 재밌는 것, 쓰레기 같은 것으로 나누자. 나도 모르게 실행하는 애플리케이션, 일상적으로 방문하는 웹 사이트, 여가를 보낼 때 읽는 책, 텔레비전과 넷플릭스로 시청하는 프로그램 및 영화, 여타 여러분이 받아들이는 적절한 정보를 전부 망라하자. 며칠 동안 수첩을 들고 다니면서 습득하는 정보를 전부 목록으로 정리하면 편할 것이다(원한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정보를 받아들였는지를 함께 적어도 좋다.). 이 일을 집과 직장에서 하자. 책과 강의, 그 밖에 직업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접했다면, 두 가지 목록을 만드는 것이 유용하다. 하나는 전문적으로 습득한 것 목록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적인 혜택이나 즐거움을 위해 습득한 것 목록이다.
1. 본인이 관심 있는 정보 중에서도 특히 다른 사람은 거의 관심이 없는 정보를 습득하자.
의미없는 쓰레기는 수동적으로 습득해봤자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진정한 즐거움을 느낄 수 없는 항목을 두 개 골라서 완전히 제거하자. 당시에는 자극적이지만 이후에는 만족감을 주지 않는 대상을 조심하자. 주의력을 철저하게 방어하자. 이를 습득하길 멈출 때마다, 삶의 가치를 더해 줄 유용한 정보가 들어갈 공간이 생긴다.
나중에 유용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어떤 유익한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거나, 대화를 나눠야 할까? 여러분은 전문성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해 특정 주제에 관해 더 복잡한 정보를 습득할 마음이 있는가? 여러분은 무언가를 개선하길 바라거나, 직장이나 집에 관해 무엇을 더 알게 되기를 바라는가?
쓸모없는 것을 하나씩 제거할 때마다 가치 있는 것을 추가하자. 자신을 격려하자. 여러분이 습득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없으며 대개는 온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팟캐스트 방송, 텔레비전 프로그램, 영화, 책에 관한 소개를 우리의 시간과 주의력을 받아가려는 영업행위라고 생각하자.
자동으로 다운로드 되는 팟캐스느 방송이나 디지털 영상저장장치에 저장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친구들이 추천해 주는 책을 전부 읽을 필요는 없다. 집중할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인지 결정하면서 한 단계를 추가로 거치는 셈이지만, 이 결정을 통해 몇 시간을 아껴서 더 나은 곳에 투자할 수 있다.
소셜 미디어 사이트를 둘러보며 시간을 보낸다면, 요리 과정 전체를 30초 만에 보여주는, 그 이상하게 만족스러운 영상에 아마 익숙할 것이다. 시금치는 1초 만에 1/5 크기로 줄어들고, 작은 닭고기 조각은 2초 만에 익는다. 여러분이 습득할지 고민 중인 내용도 비슷한 방식으로 멀리서 바라보자. 한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한 걸음 물러나 멀리서 삶을 관찰하자. 이 시간을 빨리 감아서 30초짜리 영상으로 만든다면 자신이 무엇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가?
전문 범위 밖에 있는 어려운 정보를 습득함으로써 더 이질적인 관계를 연결해 보자. 연결하는 점들이 더 이질적일수록 종종 더 가치 있는 연관성이 탄생한다.
인터넷 브라우저 홈 화면에서 위키피디아 문서를 무작위로 열 수 있도록 설정하자. 세계적으로 저명한 전문가들이 평범한 사람들이 묻는 대중적인 질문에 답해주는 레딧Reddit이라는 사이트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Ask Me Anything 부분을 살펴보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밴드의 공연을 보러 가자. 전혀 모르는 주제에 관한 책을 읽자. 바느질이나 춤이나 대중 연설 같이 늘 궁금해했던 주제에 관한 수업을 수강하자. 이름은 알지만, 그 일생에 관해서는 모르는 역사적 인물의 전기를 집어 들자. 나는 몇 달 전에 아이폰용 애플리케이션 코딩에 관한 온라인 강좌를 등록했다. 지금 그 강좌를 듣는 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가 생활 중 하나다.
여러분에게는 세상 사람 대다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주제와 더 잘하는 일이 몇 개 있다. 이 특정 주제나 기술 주변으로 점을 더 많이 모을수록, 당신은 더 전문가가 될 것이다.
가치 없는 것들을 제거할 때마다, 이미 잘하는 일이나 많이 아는 주제에 노력을 더 많이 기울이자. 예를 들어 여러분이 선생님이라면 퇴근 후 자동조종 상태로 넷플릭스를 실행하는 대신 강의를 수강하며 새로운 전문 기술에 투자하는 것을 고려하자. 이미 성취한 일에 더 노력을 기울이면 놀라울 만큼 생산성과 창의성이 높아질 것이다.
프롤로그부터 엄청난 흥미를 끌었던 책이다. "역사상 가장 발전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세상은 엉망진창으로 돌아간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우리는 세계 역사상 가장 안전한 시대를 사는 가장 번영한 인류임에 틀림없다. 저자는 이를 진보의 역설이라고 말한다. 나 또한 삶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고 방황하기 시작한지 오래되었다. 내가 나를 기준으로 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안경을 벗어던져버리고, 제 3자의 시선으로 세상과 나를 바라본다면, 정말이지 나는 그저 우주의 먼지에 불과함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성이 감정을 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감정은 날 너무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쓸데 없는 것에 시간을 보내게 만들고, 해야할 일을 미루게 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이성은 감정을 통제할 수 없다. 놀랍게도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감정이었다. 이성은 감정을 설득할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의지는 전적으로 감정에 달린 것이다.
개인의 가치관은 곧 경험의 산물이고, 가치관의 차이는 가치관이 맞는 사람들끼리의 공동체를 만들어냈고, 그 공동체에서 소속감을 느끼며 분쟁을 만들어냈다. 그 분쟁들 중에는 전쟁도 포함이 되며, 이것이 인류가 진보하는 형식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상당히 새로웠다. 결국 우리 모두는 가치관을 형성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며 이는 자신만의 정체성이 된다. 만약 정체성을 부정당한다면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들과 판단이 틀렸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정체성을 바꾼다, 흔히 말하는 "완전히 새로운 내가 되겠어!" 라는 다짐은 상당히 어려운 이유이다. 자신의 정체성은 지금까지 수없이 겪어온 자신의 경험이 탄탄하게 완벽한 근거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희망을 얻는다면? (통제력, 가치, 공동체를 모두 얻은 상태) 거기서부터 종교가 시작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영적 종교(기독교, 불교 등)뿐만이 아니라 이념 종교(민주주의, 공산주의 등)와 대인관계 종교(결혼, 스포츠, 팬덤 등)까지 무신론자더라도 우리 삶에 전반적으로 퍼져있다. 이 관점은 나에게 너무나도 새로웠다. 나 또한 많은 종교를 갖고 있었고, 그 가치관들을 지니고 있었다. 문제는 다음이다. 처음 종교의 신적 가치는 부패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얻은게 많을 수록 잃을 것도 많아지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경험함으로 희망을 잃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꿈을 진정으로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꿈을 실현하는 것이다."
의식을 하든 못 하든 당신은 어떤 집단의 믿음과 가치관을 채택했고, 의식에 참여해서 재물을 바쳤으며, 우리와 그들 사이에 선을 긋고 지적으로 자신을 분리했다. 우리는 모두 이런 행동을 한다. 종교적 믿음과 그것을 구성하는 종족적 행동은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부분이다. 그걸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이 종교를 멀리하고 논리와 이성을 사용한다고 생각한다면, 미안한 말이지만, 틀렸다.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다. 고등 교육을 받아 박식하다고 생각한다면, 유감스럽지만 그렇지 않다. 당신은 여전히 얼간이다.
우리는 모두 뭔가를 믿어야 한다. 어딘가에서 가치를 찾아야 한다. 그게 우리가 심리적으로 살아남고 번영하는 방법이다. 그게 희망을 찾는 방법이다. 설령 더 나은 미래에 관한 선견지명이 있다고 해도 혼자 힘으로 해내기는 너무 힘들다. 어떤 꿈이든 실현하려면, 감정적인 이유에서도 논리적인 이유에서도, 지지해 주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말 그대로 군대가 필요하다.
Q. 그래서 작가는 뭘말하고 싶은걸까?
나는 1부의 마지막장에서 작가가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내 방식대로 이해해보려 노력해보았다. CARPE DIEM, 현재에 집중하라는 의미인걸까? 작가는 희망을 버리는 것이 자유롭게 사는 것이라 했다. 희망은 파괴적이며 엉망진창의 원인이자 결과라고 한다. 이 말의 핵심은, 우리가 불행을 안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겨냥한 것 같기도 하다. 삶은 행복으로 가득 차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견디지 못한다. 희망하지 않으면 평가하지 않는다는 말로도 이해해보았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서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나의 공동체에 소속되는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마지막 장의 마지막 문구는 니체가 한 말이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을 사랑해. 그들이야말로 경계를 가로지르는 자들이니까."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보면서 2부를 읽기 시작했다.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희망의 원천이 바로 분열과 증오의 원천이다. 우리 삶에 가장 큰 기쁨을 가져다주는 희망이 바로 큰 위험을 야기하는 희망이다. 사람들을 더욱 가깝게 해 주는 희망이 바로 사람들을 갈라놓는 희망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희망은 파괴적이다. 희망은 현재 상태를 거부하는 것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희망은 뭔가가 망가지는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희망은 우리가 자신의 일부나 세계의 일부를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희망은 우리가 반대되는 존재가 되기를 요구한다.
p.182
이것이 기본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바라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바라라. 왜냐하면 희망은 궁극적으로 공허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개념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근본적으로 결함과 한계를 갖고 있으며, 그래서 무조건적으로 숭배하면 해가 된다. 더 큰 행복을 바라지 말라. 괴로움이 줄어들기를 바라지 말라. 성격을 개선하기를 바라지 말라. 자신의 결함을 제거하기를 바라지 말라.
이것을 희망하라. 매 순간에 존재하는 무한한 기회와 억압을 바라라. 자유와 함께 오는 괴로움을 바라라. 행복에서 오는 고통을 바라라. 무지에서 오는 지혜를 바라라. 굴복에서 오는 힘을 바라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라.
이것이 우리의 도전이자 소명이다. 희망 없이 행동하는 것, 더 나은 것을 바라지 않는 것, 더 나아지는 것 말이다. 지금 이 순간과 다음 순간, 그리고 다음, 그리고 다음.
<2부. 희망 너머의 세상>
아, 이 장을 읽으면서 충격의 연속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래, 나는 청소년기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어린이는 그저 쾌락만을 쫓는다. 청소년은 흥정을 통한 쾌락을 쫓는다. 그 중심에는 가치 평가와 비교에 의한 목표 달성이 있다. 모든 것을 거래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은 다르다. 우리가 정직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조건적이기 때문이다. 정직은 거래하지 않는다. 핵심은, 누군가를 수단으로 보지않고 목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희망을 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성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성 공식이다.
인간성 공식은 파급 효과가 있다. 자신을 개선해서 스스로에게 정직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더욱 정직해지고, 그 영향을 받아 다른 사람들도 자신에게 더욱 정직해질 것이다. 그 덕에 그들은 성장하고 성숙해질 것이다. 자신을 수단으로 취급하지 않으면 타인 역시 목적으로 대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나 자신과의 관계를 정화하면 긍정적인 부산물로 타인과의 관계를 정화하게 되고, 그들도 그들 자신과의 관계를 정화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은 계속 이어진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이념이나 대중의 종교적 개종, 미래에 대한 부적절한 꿈을 통해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각각의 개인이 성숙해지고 고귀해짐으로써 세상을 바꿔야 한다. 문화와 경험에 근거한 서로 다른 종교와 가치 체계는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고 어디에서 왔는지에 관한 서로 다른 생각은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칸트가 믿은 것처럼 고귀함과 존중에 관한 단순한 질문은 매 순간 보편적이어야 한다.
p.225
부유하고 선진화된 세계 전반에 걸쳐, 사람들은 부와 물질의 위기는 겪지 않지만, 인격의 위기와 미덕의 위기, 수단과 목적의 위기를 겪는다. 21세기의 근본적인 정치 분열은 더 이상 우파 대 좌파가 아니라, 우파와 좌파의 충동적인 어린애 가치관 대 우파와 좌파의 타협적인 청소년/성인 가치관이다. 이건 더 이상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나 자유 대 평등 논쟁이 아니라, 성숙 대 미성숙, 수단 대 목적 논쟁이다.
종종 그런 생각들을 했다. 진정 범죄같은 일들 없이 행복으로만 가득한 세상이란게 존재할까?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걸까? 여기, 기묘한 일들이 일어난다. 분명 과거에는 실제로 누군가 나를 신체적으로 해쳤을 경우에만 '폭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상황에서조차 폭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저자는 '파란점 효과'에 대해서 말한다. 세상이 편해질수록, 우리는 불편한 부분을 굳이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일 당신이 SNS 메시지 하나하나에 의미부여를 하며 기분이 나쁘다면, 아, 내가 지금 편안하고 행복하구나, 라고 생각하면 된다. 안티프래질한 삶을 살아라.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성장하라.
상황이 좋아질수록 위협이 없는 곳에서 위협을 더 많이 지각하고, 마음이 더 뒤숭숭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진보의 역설에서 핵심이다.
p249
왜냐하면 고통은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은 인간 조건의 보편 상수다. 그러므로 고통으로부터 멀어지고 모든 해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시도는 역효과를 낳을 뿐이다. 고통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면, 고통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통에 대한 민감성이 증가할 뿐이다. 모든 구석에서 위험한 유령을 보고, 모든 국가에서 독재와 억압을 보고, 모든 포옹 뒤에서 증오와 기만을 보게 된다.
p251
행복 추구는 오랫동안 우리 문화를 규정해 온 해로운 가치다. 자멸적인 동시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잘 산다는 건 고통을 피하는 게 아니라, 올바른 이유로 고통받는 걸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단순히 존재함으로 인해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고통을 잘 겪는 법을 배우는 편이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p268
고대 철학자들은 이걸 알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학파는 삶을 행복이 아니라 인격의 관점에서 보았으며, 고통을 견디고 적절히 희생하는 능력을 개발하라고 이야기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삶이란 것이 실제로 하나의 길고 긴 희생이었기 때문이다. 용기와 정직, 겸손이라는 고대의 미덕은 모두 다른 형태로 안티프래질을 실천하는 방식이었고, 혼란과 역경에서 이익을 얻게 해 주는 원칙이었다.
p269
고통은 삶의 보편 상수이므로 고통을 통해 성장할 기회는 삶 속에 늘 있다. 고통을 마비시키지만 않으면, 고통으로부터 눈길을 돌리지만 않으면 된다. 고통을 맞이하고 그 안에서 가치와 의미를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고통은 모든 가치의 근원이다. 고통에 무감각해지면 세상에 존재하는 중요한 모든 것에 무감각해진다. 고통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장 확고히 지키는 가치관과 믿음이 되는 도덕덕 간극을 열어 준다.
어떤 목적을 위해 고통을 느끼는 능력을 부정하면 삶 속에서 목적을 느끼는 능력을 완전히 부정하게 된다.
진정한 자유란 무엇일까? 우리는 베스킨라빈스에 가서 그 수많은 아이스크림의 맛 중 맘에 드는 것을 고르는 것에서 자유를 느낀다. 혹시 자유롭게 여행다니고, 밤마다 술을 마시며, 피씨방에 가서 게임을 하는 것이 자유로운 삶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자유에 대해서 잘 몰랐던 것 같다. 저자는 진정한 자유는, 포기와 절제에서 온다고 한다. 우리가 한 가지에 몰입할 수 있을 때, 다양성보다는 한 가지에 가치를 둘 때 자유로운 것이다. 선택권이 많이 주어질수록 불행하다. 언제나 다양성과 새로운 경험을 추구했던 나에게, 얼마나 억압된 삶을 살아왔는가를 깨닫게 해주는 구절이었다.
궁극적으로,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자유는 헌신, 즉 삶을 살아가며 희생하기로 선택한 것에서 나온다. 아내와 나의 관계에는 내가 다른 여성 1000명과 데이트한다고 해도 재현할 수 없는 감정적 자유가 있다. 20년 동안의 내 기타 연주에는 단순히 수십 개의 노래를 암기해서는 얻을 수 없는 자유가 있다. 50년 동안 한곳에서 사는 것에는 세계를 아무리 많이 구경해도 되풀이할 수 없는 공동체와 문화에의 친밀함과 익숙함이라는 자유가 있다.
더 크게 헌신하면, 더 심오한 깊이를 얻을 수 있다. 헌신이 부족하면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p294
가짜 자유는 더 많은 것을 뒤쫓도록 우리를 쳇바퀴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나 진짜 자유는 더 적은 것으로 살아가기 위한 의식적인 결정이다.
가짜 자유는 중독성이 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언제나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느끼게 된다. 진정한 자유는 반복적이고, 예측할 수 있고, 때로는 따분하다.
가짜 자유는 세상을 자기가 이기고 있다고 느끼는 거래와 흥정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진짜 자유는 세상을 무조건적으로 보는 것이고, 유일한 승리는 자신의 욕망을 이기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오락과 그로 인한 가짜 자유의 과잉은 우리에게서 진짜 자유를 경험할 능력을 제한한다. 선택 사항이 많을수록, 우리 앞에 다양성이 풍부할수록, 선택하고, 희생하고, 집중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난제가 오늘날 우리 문화 전반에 퍼져있는 광경을 보고 있다.
p299
달리 말하자면, 민주주의는 대단히 성숙하고 인격적인 시민을 필요로 한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사람들은 기본적인 인권을 아무런 불편을 겪지 않는 것이라고 혼동한 듯싶다. 사람들은 자신을 표현할 자유를 원하지만, 자신을 불쾌하게 할 수 있는 견해는 상대하지 않으려 한다. 사업의 자유를 원하지만, 그 자유를 가능하게해 주는 사법 조직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는 세금은 원치 않는다. 평등을 원하지만, 모두 같은 쾌락이 아니라 같은 고통을 경험하는 것에서 평등이 온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자유는 그 자체로 불편함을 요구한다. 불만을 요구한다. 사회가 더 자유로워질수록 개인은 자신과 상충하는 견해와 생활 방식과 생각을 더 많이 고려하고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덜 용인하고 가짜 자유에 탐닉할수록 자유로운 민주주의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는 데 필수인 미덕을 유지하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오늘의 모든 문제가 마술처럼 해결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내일의 피할 수 없는 문제를 지각할 것이다.
괴롭다면 견뎌야하고 상실감이 크다면 그 또한 감내해야 하며. 거절당할 것 같다면 용기의 미덕을 갖고 도전하고 또 거절의 고통을 견뎌야한다. 만약 오늘도 고통스러운 하루를 보냈다면 참으로 의미있는 하루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무한 긍정을 요구하는 R=VD 의 자기계발서들은 대개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책은 그런 뻔한 이야기를 하는 자기계발서들과는 다르다. 제목 그대로, 인생에 도움도 되지 않는 거추장한 부속물들을 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명심하라. 실제로 행복한 사람은 절대 거울 앞에 서서 '나는 행복하다'고 주문을 걸지 않는다.(p53)
우리는 모두 각오해야 한다. 왜 우리는 저 달콤한 꿀만을 인지하고 그 주변에 있는 왱왱대는 벌들을 보지 못하는가? 사람들은 결과만을 생각하고 그 과정에 집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과정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그야말로 문제의 연속임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문제가 해결! 되는 순간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말은 이렇게 해도, 솔직히 너무나도 두려운 게 사실이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싫어할거야.' 라는 생각은 나를 행동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만든다. 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하고 후회하라는 말이 있다. 어쩌면 저자는 이 부분에서도 "책임" 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저자는 불편한 감정이 들 때, 우리는 그 감정을 마비시키고 다시 '좋은 감정' 으로 돌아가기 위해 잘못된 방법일지라도 몰두한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자신이 선택한 고통을 견디는 법이다.(p179) 나는 지금껏 고통을 견디는 법을 몰랐던 것 같다. 아니, 고통을 견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려하지 않았고 고통을 회피했다. 그 대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견뎌야 한다. 사람들은 애인이나 배우자와 함께하는 삶을 꿈꾼다. 하지만 거절을 견뎌낼 때 느끼는 괴로움, 발산하지 못하고 쌓여가는 성적 긴장감, 얼빠진 눈으로 종일 바라봐도 도무지 울릴 생각을 안 하는 전화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멋진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없다. 이런 것들은 사랑이라는 게임의 일부다. 게임을 하지 않으면, 이길 수도 없다.(p40)
신경을 끈다는 건 삶에서 가장 무섭고 어려운 도전을 내려다보며 아무렇지 않게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p56
감정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행위가 도움이 안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감정은 늘 변하기 때문이다. 오늘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내일이면 아무것도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우리는 항상 지금보다 더한 것을 원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행복에 집착하는 자는 '또 다른 것', 이를테면 새 집, 새로운 관계, 자식의 성적, 또 한 번의 연봉 인상 등을 끝없이 좇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아무리 땀 흘려 노력해봤자, 결국 섬뜩할 정도로 처음과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된다.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 말이다. 심리학자들은 이 개념을 '쾌락의 쳇바퀴'라고도 부르는데, 사람들이 생활환경을 바꾸기 위해 늘 열심히 일하면서도 실제로는 전혀 달라졌다고 느끼지 못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이것이 문제가 되풀이 되고, 우리가 문제를 피할 수 없는 이유다. 당신이 결혼하는 사람이 당신과 싸울 사람이다. 당신이 구입하는 집이 당신이 수리할 집이다. 당신이 선택하는 꿈의 직업이 당신에게 스트레스를 줄 직업이다. 어떤 일이건 희생이 따르는 법이다. 다시 말해, 우리를 기분 좋게 해주는 것은 한편으로 우리의 기분을 해치기 마련이다. 얻음은 곧 잃음이기도 하다. 긍정적 경험이 부정적 경험을 규정할 것이다.
p184
행동은 동기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p186
'뭐라도 해' 원리를 따르면, 실패가 하찮게 느껴진다. 모든 결과가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성공의 기준은 그저 행동하는 것이며, 자극은 전제조건이 아니라 보상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실패하고, 실패는 또다시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
"선택과 집중" 이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현대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무수히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또한 나같은 성격을 지녔다면, 모든 선택들을 다 경험해보고 싶고, 폭넓은 이해를 추구할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즐겁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은 언제나 짜릿하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포기와 거절, 그로써 발생하는 몰입의 미덕을 알게 되었다. 나는 오늘부로 선택을 포기하겠다. 그럼으로 중요한 일들에 몰입하겠다.
몰입할 때 자유를 얻는 까닭은, 더는 사소하고 하찮은 일에 흔들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몰입하면 자유로운 까닭은, 중요한 일에 집중해 정신을 가다듬는 게 건강과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몰입하면 결정을 내리기 쉬워지고 좋은 것을 놓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칠 수 있다. 지금 내게 있는 게 충분히 좋다는 걸 안다면, 무엇 때문에 마냥 더 좋은 것을 쫓아다니느라 스트레스를 받겠는가? 몰입하면 아주 중요한 몇 가지 목표에 집중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대단한 성공을 이뤄낼 수 있다.
이처럼 대안을 거부할 때 우리는 자유를 얻는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와 자신이 선택한 기준에 어긋나는 것을 거부할 때, 깊이 없이 폭넓은 경험만을 추구하기를 거부할 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이 책은, 삶을 살아가면서 거추장한 짐들에 버거워졌을 때 혹은 그것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글씨체로 적혀진 메모지처럼, 버리지못하고 있는 쓰레기인줄 모른채 삶 속에서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싶을 때, 버리는 기술에 대해서 말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삶이 한결 가벼워지고 무의미한 가치에 매달리지 않게 되며, 한 가지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을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 내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했거나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자기자신을 질책하곤 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다음에 있다. 나는 비슷한 문제 상황을 계속해서 반복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특정 길목을 지나는데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고 해보자. '아, 저 돌부리를 피해갔어야 했는데 정말 바보같아. 왜 그걸 제대로 못봤지? 넘어지기나하고. 나는 왜 이렇게 덜렁대는거야.' 그렇게 자책을 하고 지나가면, 또 다시 그 길목을 지나가야 하는 상황이 생겼을 때 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게 된다.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나는 그걸 몰랐다. 실수에 대한 자책을 할 것이 아니라 그 길목에서 돌부리를 치워야 한다는 것을.
작가는 본인에게 특정 행동에 대해서 왜? 라는 질문을 계속 해보라고 제시했다. 특정 행동에 대해서 왜? 라는 질문을 반복하다보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 점이 너무 신기했다. 본인이 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또, 대개 예민하거나 꺼려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본인만의 콤플렉스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자신의 방어기제에 대해서, 왜 내가 그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해서,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을 때, 또 내가 어떤 잠재력을 가진 사람인지, 나를 더 알아가고 싶다면 반드시 읽기를 추천하는 책이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 다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어떤 사소한 기억도 중요하지 않은 기억은 없다. 좋든 싫든 내가 어떤 것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내면의 깊은 곳에서 그것을 기억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경험은 내 삶의 패턴을 만든다. 경험은 곧 기억이다.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을 살펴보면 내 삶의 패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딜레마는, 우리는 강력하고 충격적인 기억에 더 강력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쁜 기억" 일 수록 더 오래, 자주 생각난다. 그리고 대개 잊혀지지 않는 나쁜 기억일수록 내가 가장 고통받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부족감을 지녔는지, 상처를 받았을 때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대해 직면하게 된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세계에서는 자신이 믿는 것만이 사실이 된다.
p.101 B는 애교 있는 아이였다. 마음을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나와는 다르게. 나는 그것을 패인으로 인식했다. 패인. 그렇다. 패인. 나는 어느새 나 홀로 경쟁하고 있었고 거기서 졌다. 다시는 질 수 없었다. 나는 살고 싶었고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겨야 했다. 이미 내 인생은 전쟁이 시작되었고 나는 전략을 짜야만 했다. 나는 스스로를 검열했다. 사랑받기에 무엇이 부족했는지 끊임없이 B와 비교했다. 한번 시작한 '오답찾기'는 끝도 없이 나왔다. 성격은 물론 눈썹 길이까지. 사실 그것은 B와 나의 차이점 찾기였을 뿐인데 그때의 나는 몰랐다. B는 내가 '다른 예시'가 아니라 '정답'이었기에.
p.153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것만 부분적으로 본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어쩌면 모두 소설가일 것이다. 순전히 나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나의 주관적 생각을 덧붙이고, 나의 신념을 투과해서 말이다. 태어날 적부터 우리는 우리의 시각에서, 우리가 해석하고 이해한 한계 안에서 사건을 기록해나간다. 그것은 온전히 자신의 시각으로 쓰인 소설이기에 소위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팩션(Faction)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허구는 아니나 모두 사실도 아니다. 내 인생에 등장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나의 시선으로 재창조된 창작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악역도, 조력자도 모두 내가 그렇게 결정했을 때에만 그렇게 존재한다.
p.156 3자의 관점을 통해 자신의 기억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당시의 감정이나 생각에 동일시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제야 우리는 보지 못했던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p.161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단 하나다. 내가 본 것,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절대적 진리는 아니라는 것.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에는 내가 보지 못하는 조각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드디어 나의 세계에 조그마한 창문이 생기는 것이다. 그 비어있는 한 조각의 창문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삶을 관통하는 근본적 두려움 : 거절당함
p.103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말 별것 아닌 사소한 일에 크게 분노하고 화가 날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열등감을 직면하는 순간이다. 자신의 근원적인 부족감을 자극해서 그 사소한 행동만으로도 존재 자체를 거부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삶에 문제가 발생하는 시기는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할 때다. 정확히는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다고 느낄 때다.
부족하다는 감각은 망상일 뿐이다.
p.172 기억하자. 우리는 분노와 공포 대신에 희망을 '선택'할 수 있음을. 어떠한 기억이 내게 부정적인 의미를 제공한다면 그것에 동의하지 말아야 한다. 기억이 주는 의미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고로 스스로 '다시 선택'할 수 있다. 그저 상황 속 등장인물로서가 아니라 제 3자의 시선에서 그저 가만히 바라보면 된다. 어떠한 분노도 없이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다.
p.194 일기장에는 온통 엄마가 얼마나 나쁜 엄마인지부터 나를 얼마나 괴롭히는지에 대한 문장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사실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단 한 문장이었다. "엄마, 나를 더 사랑해주세요."
p.195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다. A는 '아'를 사랑이라 생각하고, B는 '어'를 사랑이라 생각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A가 아무리 '아'라고 하면서 사랑을 속삭여도 B는 온통 불만일 뿐이다. A는 한 번도 내게 '어'라고 표현하지 않았다면서. A도 마찬가지다. 둘은 점점 지쳐가고 결국 마음을 닫아버린다. 수많은 연인과 부부, 아이와 부모의 관계에서 이같은 오해들이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다. 당신은 어떨 때 사랑을 느끼는가?
그 사람의 뒷모습까지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성장한다.
p.252 이것은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다. 결정하는 순간 가능성은 사라진다. 성격이 타고난 것이라면 변화의 가능성은 사라진다. 그러나 삶에서 가능성을 지니고 사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미래가 지금보다 나아지리라는 가능성 없이 어떤 누가 희망을 품을 수 있겠는가.
<나쁜 기억 세탁소> 는 도서관에서 전공 책을 빌리러 갔다가, 문득 제목이 눈에 들어와서 빌려 읽게된 책이다. 그렇게 우연히 마주치게 된 책이었지만, 책을 다 읽고 났을 때에는 나의 생각의 틀을 한 단계 깨부신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나 자신만의 생각에 갇혀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혼자 "결정"하고 있었던가.
과거의 나 자신의 행동이 후회되는 순간들이 있다. 예를 들면, 실수로 놓쳐버린 시험 범위라던지 혹은 무심코 다른 사람에게 상처되는 행동이나 말들을 했다던지. 역설적이게도, "내가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내 자신의 실수를 용서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같은 행동을 했을 때는 '그래, 그럴 수 있지.' 라고 넘길 만한 일들도 내가 그러한 실수를 한다면 '왜 그랬지' 의 늪에 빠져버리게 된다.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하기에, 완벽주의를 꿈꾼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 오히려, 실수와 허점 투성이인 것이 자연스럽다.
내 기억은 순전히 나의 관점에서 각색된 것이며, 얼마나 많은 즐거운 기억들이 단 하나의 얼룩진 기억에 가려져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 지금 당장 오로지 바꿀 수 있는 것은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와 내 생각뿐이다.
우리 모두는 고여있지 않다.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나를 정의할 수 없다. 가능성이란 그런 것이다. 만일 타인이 나를 "00한 사람" 이라고 결정지어버렸다면,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된다. 그건 그 사람이 그 틀안에 갇혀있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을 온전히 모르듯이, 그 사람도 나를 온전히 알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변화할 수 있고, 과거는 현재가 아니다.
타인이 실수할 수 있듯이, 나도 실수할 수 있다. 나 자신에게 너무 채찍질하지말자.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
아들러는 이야기한다. 행복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고.
누군가는 나의 삶을 너무나도 부러워할 수도 있다. 나에게 부족한 것에만 집중하느라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만 집중하느라고 보지 못했던 행복한 것들과 가진 것들은 생각보다 많다. 뭔가를 더 가지지 못해도 지금 나는 현재로서 충분히 온전하고 괜찮은 사람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