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013

 삶의 의미가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얻기 위한 도구적인 일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일과 그 자체를 위해 몰두하는 활동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지, 우디 앨런처럼 천문학적으로 먼 거리에서 삶을 관찰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을 도구적으로 보는 것, 이 것에 대한 언급은 <미움받을 용기> 라는 책에서도 한 번 들어봤던 개념이다. 그 때 분명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도구적으로 보지 않으려 노력하겠노라 다짐했건만, 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내가 그 다짐을 잊고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은 과도하게 도구화가 되어가고 있다는 작가의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나또한 그렇다. 나에게 있어 도구적이지 않고 그 자체로써 가치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봤다. 그런데 도구적이라고 생각하는지의 여부를 판가름 하는 것조차 어렵게 느껴졌다.


p 022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기본적인 전제 가운데 하나는 역설입니다. 그러니까 인문학을 포함해서 많은 학문은 바로 그 쓸모없음 덕택에 쓸모가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우리가 삶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는 쓸모만 따져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 깊은 의미에서, 더 실존적인 의미에서 쓸모가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술과 놀이, 사랑, 윤리 같은 가치는 쓸모없을 때, 그러니까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쓰이지 않고 그 자체로 목적일 때 가장 쓸모가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가 놀거나, 사랑을 하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은 그런 행동을 통해 다른 이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진자 알맹이가 되는 것, 의미를 주는 것은 이른바 이런 쓸모없는 일들입니다. 인문학은 바로 이러한 현상을 주로 다루기에 중요한 것이지요.

 

 21세기는 그야말로 효용성을 가장 중시하는 사회이다. 어렸을 때부터 가치있는 일 혹은 인성보다는 성적 순으로, 적당한 나이가 되면 응당 해야할 그에 걸맞는 역할들로 가득차있다. 만약 그 길을 향하는 여정에 있어서 나만의 샛길로 돌아가게 되어 조금이라도 늦어진다면, 인생 낭비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실 나 자체도 그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일명 "투자 대비 효율"을 최대화해야한다는 강박에 항상 갇혀있는 것 같다. 지금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이 순간까지도. 그러나 작가는 말한다. 쓸모없기 때문에 쓸모있는 일도 있다고.


p 025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찾는 데 몰두하기보다는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윤리적 가치로서 선은 그 자체로 목적인 반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보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수단일 분이니까요. 정말 최악의 경우에는 진짜 나를 찾는 일이, 앞서 언급한 경우처럼 좋은 사람이 되는 걸 막는 장벽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좋은 사람이 되는 동시에 진정한 자기 자신도 찾을 수 있다면 굉장히 근사하겠지요. 그러나 둘 가운데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제가 심리학을 비판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심리학은 개인이 다양한 심리학적 도구를 활용해 자기 자신을 찾고 계발하도록 돕는 일에는 도움을 줄지 모르지만, 개인을 윤리적ㆍ사회적으로 성숙시키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심리 치료가 시작된 이래로 100년간 우리 삶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심리학은 우리가 자기계발을 하거나 무언가를 배우거나 자아실현을 추구할 때는 지나칠 정도로 유용하지만, 쓸모없는 것은 완전히 무시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심리학, 적어도 심리학의 일부는 우리 사회의 도구화 현상뿐 아니라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문화, 더 나아가 노골적인 나르시시즘을 심화시키는 데도 기여합니다.

 

 나는 올해들어 심리학 책을 부쩍 많이 읽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나도 날 잘 모르겠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어서 였다. 심리학을 배워가면서 가장 많이 뇌리에 박힌 내용은 "인생따위 멋대로 살아도 좋은 것이다." 였다. 이런 태도가 너무나도 눈치를 많이보는 사회에서 분명 필요한 자세는 맞지만, 한편으로는 이기주의를 부추길 수도 있는 주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진정한 나 자신을 찾아가는 자세도 중요하지만, 어떤 내가 될 것인지 생각하고 또 직접 그러한 내 모습을 만들어가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같다. 내가 그렇게 되고 싶고, 또 그렇게 된다면, 그러한 모습 또한 진정한 나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작가는 이 책에서 10명의 철학자를 소개하며 10가지의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을 안내한다. 그동안 심리학 책을 읽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길의 방향을 제시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은, 이미 존재하는 사실에 대해서 의미를 찾고 관점을 달리 해서 해석하는 데에 집중했던 것 같다. 과거를 재해석하는 기분이었달까. 그러나 이 책은 미래를 말하고 있다. 당신이 이제는 뭘 해야할지에 대해 안내해준다. 효율이 철저하게 최우선 가치로 여겨지는 현대에서, 왜 내가 그토록 공허하고 허무했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책에서 제시하는 10가지 생각들>

1. 그 자체로 가치있는 일이 우리에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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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 자체를 위해 하는 것이 선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56p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중요한 것은 선을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라고 정의한 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선은 일반적인 효용성의 관점에서는 쓸모없는 것으로 구성되며, 또한 역설적이게도 쓸모없기 때문에 쓸모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59p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도구적 관계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런 관계를 맺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을 정의하는 본질적인 특징이라 말하지요. 비도구적 관계가 가능하지 않다면 우리는 다른 동물과 다를 바가 없는, 그저 진화가 많이된 원숭이에 불과할 테니까요.

 

61p

 그런 주관주의적 입장에서는 기본적인 가치를 둘러싼 근본적 차이에 관해 사람들은 끝내 타협하지 못하고 싸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개인이 주관적으로 인정하든 말든 선한 것이 따로 존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이 옳다면, 우리에게는 이성적으로 선의 가치를 논의할 가능성이 열립니다. 가치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태도를 다른 사람에게 들이밀며 싸우는 대신에 말입니다. 

 

62p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내가 그냥 그런 사람!' 이라서가 아니라 이성적 존재가 되는 일이 인간됨의 본질을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나답지 않아!'라고 생각하더라도 우리는 마땅히 인간으로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68p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세상에는 그 자체로 목적이면서 선한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고, 선이란 무엇인가 고민하면서 우리 삶을 이끄는 관점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선한 것은 그걸로 이익을 얻거나, 단순히 그걸 좋아하기 때문에 선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선하다는 이유 그 자체 때문에 선을 좋아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내내 단단히 지켜야 할 실존적 관점입니다.

2. 쓸모없기 때문에 쓸모가 있는 목적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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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성은 가격으로 따질 수도 없고 대체될 수도 없다"

- 이마누엘 칸트

 

80p

 등가성이란 말 그대로 '같은 값어치가 있다'는 뜻으로, 돈이 서로 완전히 다른 것들의 값어치를 측정하고 비교하는 데 쓰인다는 것이지요. 돈으로 따지면 셰익스피어의 전집은 운동화 한 켤레와 같은 가치를 지닙니다. 위대한 작가의 작품 전집을 운동화 한 켤레와 비교하는 게 어처구니없지만, 우리가 돈이라 부르는 도구는 그걸 가능하게 해줍니다. 우리가 바쁘게 일상을 살아갈 때는 이런 일이 어처구니없다는 것조차 잘 알아차리지 못하지요.

 

83p

 인간의 보편적인 경향성과 필요에 관련된 것에는 시장 가격이 있다.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취향에 들어맞는 것, 즉 순전한 재미와 놀이를 위한 것에는 애호 가격이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이 목적 그 자체가 될 수 있게 하는 조건에는 상대적인 가치인 가격이 아니라 내적 가치인 존엄성이 있다.

 

84p

 내적 가치를 지닌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목적의 왕국을 구성하는 구성원인 사람과, 사람을 목적의 왕국의 일원으로 만들어주는 것들입니다. 후자의 예로는 칸트가 말하는 '약속에 대한 충실함(정직)'과 '원칙에서 나온 선행(호의)' 같은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것에는 사람처럼 존엄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정직과 호의를 사고팔거나 이것에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행위에 가격을 매기고 구입하려 한다면, 그 과정에서 반드시 존엄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를 역설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겠네요. 진정한 가치를 지닌 것일수록 가격을 매길 수 없다고 말입니다.

3. 지키지 못한 것들에 왜 죄책감을 느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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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약속하는 동물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p100

 우리는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을 때 스스로를 더 잘 돌아보게 됩니다. 즉,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존재와 행동을 해명하라고 요청받을 때, 비로소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나 자신과도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지요. 만약 다른 사람에게 이런 요청을 받지 않는다면, 즉 무인도처럼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 놓인다면 우리는 반성을 통한 자의식을 키울 수 없게 됩니다.

 

p101

 어쩌면 아이는 자신이 정말 왜 그랬는지 모른다 해도 자신의 행동을 해명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비로소 아이는 책임감 있는 존재로 대접받지요. 발달심리학은 타인에게 책임 있는 존재로 대우받았다는 사실이 아이를 책임감 있는 존재로 만든다고 합니다. 니체의 표현처럼 타인과 약속할 권리를 지닌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이런 과정에서 죄책감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버틀러의 말처럼 "죄책감은 주체가 되는 것을 가능케" 하니까요.

 타인과 맺은 약속에 대한 책임과 죄책감이 있기에 아이는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행동도 평가하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단지 하룻밤 사이에, 또는 죄책감을 느낄 일을 겨우 한두 번 경험한 뒤 곧바로 책임감 있는 존재가 되지는 않습니다. 책임감 있는 존재가 되는 과정은 길고,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차츰 주체성을 확보하고, 자기반성적 개인을 창조합니다. 달리 말해, 우리는 약속할 권리를 지닌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p103

 하지만 오늘날의 도구화된 문화에서는 이런 토대가 점점 약화되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사회는 새로운 것을 좇고 일시적으로만 합의되는 일이 늘고 있지요. 우리는 서로 당분간 약속을 지킵니다. 어쨌든 약속을 하긴 하지만 더 나은 것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유지하는 거지요. 더 좋은 모임, 더 좋은 일자리, 더 좋은 연인이 나타날 때까지만 유지되다가, 끊임없이 더 나은 것으로 대체하지요. 이는 급변하는 유행에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 심리인 포모증후군(FOMO; Fear Of Missing Out)에 걸린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당분간만 지속되는 약속은 엄밀히 말해서 더 이상 약속이 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그런 약속을 하는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득을 주는 도구화된 약속일 뿐이지요.

 

p104

 약속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설령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약속을 지키는 일에는 존엄한 면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약속은 우리 삶의 단단한 관점이 됩니다. 결코 도구화될 수 없는 본질적인 가치가 있으니까요. 그러한 약속을 토대로 굳건히 서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인간성은 너무도 쉽게 흔들리고 말 것 입니다.

4.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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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란 관계 그 자체와 관계하는 관계다"

- 쇠렌 키르케고르

 

p114

 도덕적으로 분노하거나 책임을 묻는 일은 오직 상대가 자신의 행동과 관계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상대가 키르케고르가 말한 자기라는 개념을 갖고 있을 때, 칸트가 목적의 왕국이라 부른 것에 속할 때에만 말이지요. 따라서 이 자기라는 개념은 인간이 본성과 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의미 있는 삶을 사는 토대가 될 수 있으며, 굳게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훌륭한 관점이 되는 것이지요.

 

p116

 우리는 자아발달 과정에서 고립된 상태가 아니라, 오직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반성적 자아를 기릅니다. 갓 태어나 말도 못하는 작은 인간이 칸트가 말한 존엄을 지닌 개인이 되기 위해서는 부모, 형제자매, 친구 등 무수히 많은 타자의 눈을 통해 자신을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할 때 비로소 우리 자신과 관계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는 셈입니다.

 

p122

 이와 달리, 오늘날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자아 개념은 이미 도구화가 됐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자기계발로 최적화되어야 할 상품이 되었지요. 심지어 연애나 우정 같은 인간관계에서도 효율성을 따지게 될 정도로 말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일이 의미가 있고 그 자체로 목적으로 삼을 만해서가 아니라, 오직 행복과 성공을 성취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가 될 때에만 그것을 활용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 속에서 자아는 더 나은 성과를 좇는 개인의 또 다른 도구가 됐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도구로 만들어버린 것이지요. 지금도 경영학과 자기계발의 권위자라는 사람들은 줄줄이 여러분 앞으로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가장 중요한 경영 도구는 당신 자신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 이 강의에서 강조하는 10가지 관점은 그 자체로 도덕적인 가치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바로 약속, 책임, 진실, 사랑, 용서 같은 것들이지요. 사람은 이러한 가치를 통해 보다 건강하게 자기 자신과 관계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도구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인 흐름과는 달리, 저는 이런 가치가 여전히 존재하며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p123

 그러니까 우리를 구성하는 관계의 중요성을 잊지 않는 것은 삶을 보다 의미 있게 만드는,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 일입니다. 이러한 반성적 자기 관계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어떠한 책임도 의무도 도덕성도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요.

5. 불확실한 세상에서 신뢰를 쌓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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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진실할 수 있다"

- 한나 아렌트

 

p131

 우리는 삶을 '조에(zoe; 생물학적 생명)'보다는 '비오스(bios; 정치 공동체적 삶)'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스 고전 철학자의 생각을 되살린 이 개념에서 '조에'는 인간이나 개, 고양이 같은 동물로서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관점으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삶을 의미 있는 방식으로 능동적으로 살아가며, 그것을 의미 있는 다양한 이야기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비오스, 일대기로서의 삶인 것이지요.

 

p133

 이처럼 뚜렷한 목적 없이 아무렇게나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의 본성을 철학 용어로는 '우연성'이라고 하는데요. 지금까지 계속 달라졌고 앞으로도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세상은 분명 우연적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우연적인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우리가 굳게 딛고 설 실존적 관점을 주장하는 것은 쓸데없거나 순진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렌트를 비롯해 제가 강의에서 소개하는 여러 철학자라면 우연성 자체보다 우리가 이 우연성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망르 격언처럼 듣고 삽니다. 누구나 예측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유연하게 적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주장은 결과적으로 지금 같은 상태를 유지하자는 말일 뿐, 현실의 문제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대응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좀 더 현명한 응답은 이런 것입니다. 안정성은 세상에 주어진 조건아 아니기에, 그것을 만드는 일이 바로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보다 진실하게 말하고 믿을 만하게 행동하려고 애씀으로써, 이 우연적이고 유동적인 세상을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영원하고 변함없는 구조를 이 세상에 세울 수는 없겠지만, 몇몇 중요한 윤리적 가치를 관계 속에서 만들어 갈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전부일 것입니다. 그러려면 삶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삶을 대상화하지 말고, 그 내부의 구체적 현실에서부터 삶의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p136

 물론 진실에 대한 요구는 종종 다른 요구와 충돌할 수도 있습니다. 진실을 지키기 위해 큰 손해를 입거나 심지어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지요.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은 우리가 언제든 이처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실존적 진실에는 근본적인 존엄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건강하거나 성공하거나 행복해지기 위해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운이 좋아서 이 모두를 동시에 얻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진실과 신뢰를 지키며 살아야 하는 이유는 오직 그것이 그 자체로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6. 타인에 대한 나의 영향력을 점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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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은 그의 삶 무언가를 손에 쥐는 일이다"

- 크누 아이레르 로이스트루프

 

p144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삶이 이처럼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입니다. 삶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는 일"이며, 그것을 통해 "그 사람 삶의 무언가를 자기 손에 쥐게 되는 일"입니다. 이를 토대로 로이스트루프는 '윤리적 요구'라는 개념을 이끌어냅니다. 윤리적 요구란 바로 "당신에게 건네진 다른 사람의 삶을 보상피라는 요구"이자 책임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에게 의존하며, 당신의 권력(힘)이 닿는 범위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의 삶의 일부를 돌봐야 한다는 요구는 사람 사이의 근원적인 상호 의존과 직접적인 영향력에서 생겨난다."

 

p146

 따라서 우리는 권력을 휘두르거나 제거해버리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써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윤리적 요구이지요. 이런 윤리적 요구가 없다면, 우리는 지금 생활하는 것처럼 상호 의존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p155

 세넷은 장인을 그 일 자체를 잘하려는 욕망과 사명감을 가진 존재로 정의합니다. 외과의사든 목수든 프로그래머든 교사든 어느 한 분야의 장인은 자신의 일 그 자체에 몰두합니다. 세넷은 이것을 보다 넓은 관점에서 정의합니다. 완성도 높은 좋은 작업이 어떤 것인지 규정하는 특정한 기준을 가지고 업무를 수행하며, 그런 기준을 토대로 신참을 교육하기도 하는 창조적인 활동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일터에서 사람들을 움직이는 동기는 돈이나 승진 같은 개인의 성공입니다. 일 그자체에 집중하는 장인과는 관심사가 아예 다르지요. 돈을 위해 일을 하든 개인적인 성공을 위해 일하든, 어쨌든 그들에게 일은 도구가 되어버립니다. 그게 반드시 잘못됐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넷은 일 자체를 잘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마침내 훌륭한 경지에 도달하는 장인의 소망이야말로 우리가 삶의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7. 내가 아닌 존재에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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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우리 자신 외에 다른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가능한 무척 어려운 깨달음이다"

- 아이리스 머독

 

p163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의식은 개인과 별개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서 나옵니다. '실존하다(exist)'는 말은 '나타나다'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는데요. 먼저 우리의 의식이 있어야, 세상에 의미나 목적, 가치가 생겨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실존주의를 일종의 주관주의로 만듭니다. 이러한 주관주의적 입장에서 의미는 오로지 개인의 가치 선택을 통해서만 생깁니다.

 이처럼 사르트르가 삶의 관점을 선택하거나 창조해야 하는 것으로 보는 반면, 머독은 관점이 선택될 때보다 주어질 때가 많다고 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렇게 주어진 것을 인식하고 발견하는 일이지요. 머독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우리 주변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충분히 관심을 가진다면, 별다른 문제없이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여러 관점을 통해 무슨 일이 옳은 지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머독은 우리가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실존주의가 말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따지고 선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우리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사회에, 그리고 다양한 상황에 따르는 사람들의 행동에, 그리고 주된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p165

 머독에게 선은 최고의 개념입니다. 다른 모든 개념을 판단하는 기준점이 되지요. 예를 들면 우리는 이런 식의 문답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공평해야 한다. 그렇다. 그런데 공평은 항상 선한가?'

 

p168

 무엇이 선인지는 개인이 혼자 정할 수 없습니다. 선을 구성하는 것은 우리의 주관 너머에 있지요.

 

p177

 머독의 메시지는 사랑이 단지 주관적인 느낌이 아니라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다른 무언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는 과정 그 자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굳이 우리 자신을 사랑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니까요. 사랑은 도구화되는 순간 그 의미를 상실합니다. 사랑은 오직 이런 것입니다. "널 사랑해, 정말로.(I Love you, period.)" 바로 미국의 록밴드 조지아 새틀라이츠의 댄 베어드가 노래한 것처럼 무조건적이지요. 우리가 도구화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사랑의 진짜 의미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 말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8. 불가능하기에 가능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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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일이다"

- 자크 데리다

 

p192

 용서에 대한 데리다의 해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 진정한 용서는 무조건적이라는 것입니다. 용서가 수단이 된다면 더 이상 용서일 수 없으니까요. 둘째, 용서할 수 없는 것만 용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용서, 예컨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말므로스의 용서 같은 것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을 상호성과 대칭성, 예컨대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는다는 논리로 이해합니다. 반면 용서라는 개념은 관계가 상호적이고 대칭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명백하게 도전합니다. 다른 어떤 실존적 관점들보다도 강하게 말이지요. 데리다는 "네가 용서를 구하고 앞으로 달라지겠다고 하면 널 용서할게"라는 식으로 조건이 붙는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p195

 내가 그곳에서 카스트루프 공항에 혼자 서 있는 아버지를 봤을 때, 처음에는 진짜 뭣 같은 기분이었다. 늦은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마중 나오리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얼마나 외로운지 알 수 있었다. 그건 너무 실존적인 상황이었다. 뭐 어쨌든 결국 우리는 혼자니까 말이다. 나는 아버지가 늘 어른이고 강하며 제멋대로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으로 여겼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훨씬 더 복잡한 존재로 보였다. 나는 그때 그 자리에엇 아버지를 용서했다. 그때부터 영원히. 그 용서는 아버지가 내게 저지른 일에 관한 게 아니다. 물론 아버지가 내게 한 일들 자체는 여전히 용납할 수 없다. 다만 그건 그냥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하는 용서였다.

 이 글에 묘사된 용서는 실존적인 의미에서 미리 계획되거나 계산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터져나온 것입니다.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일어난 거지요. 의식적인 선택의 결과가 아니었음에도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테페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그건 내가 드디어 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내 삶에서 최고의 경험 가운데 하나였다. 아버지를 용서하고 싶던 적이 없었음에도 그를 용서한 것 말이다."

 그의 이야기는 용서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관심의 윤리적 중요성을 강조한 머독의 생각과도 통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용서가 한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에게 관심을 기울일 때 가능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p196

 데리다는 윤리적 선택을 할 때 모든 상호성과 대칭성을 거부하라고 말합니다. 이런 입장은 레비나스와 로이스트루프의 철학에서도 보이지요. 윤리적 요구에 대해 이들은 그 무조건적 본성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거나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그와 똑같은 행위를 기대해서가 아닙니다. 무언가 선한 것을 돌려받으리라는 기대로 선한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기에 선한 일을 해야 하는 거지요. 로이스트루프는 윤리적 요구의 일방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윤리적 요구의 일방성은 바로 개인의 삶 역시 끊임없는 선물이라는 이해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우리가 실천하는 일의 보답으로 다른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은 있을 수 없다." 윤리의 비대칭성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표현한 문장이 또 있을까요. 동시에 오늘날처럼 도구적 사고가 만연한 사회 흐름에 역행하는 말이 또 있을까요.

 로이스트루프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선물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용서를 비롯해 제가 강의에서 제시하는 여러 삶의 관점을 당연히 받아야 할 선물이나 이익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그 가치를 주관적인 욕구 충족으로 떨어뜨려서 고유의 가치를 파괴하게 될 테니까요.

9. 어떤 순간에도 희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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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특권이 아니라 책임으로 이루어진다"

- 카뮈

 

p203

 앞에서 저는 인간에게 자유의자가 없고 모든 행동이 이미 결정됐다면, 우리가 제대로 살아갈 수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는데요. 실제로 우리가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유가 있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칸트가 지적한 대로, 어쩌면 우리는 진짜 자유의지가 있는지 없는지 최종적인 해답은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런 가정을 통해 우리는 목적의 왕국이라 불리는 곳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며 서로 관계할 수 있고, 의미 있는 삶도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p214-215 요약

 이론적으로는 어느 친절한 독재자가 나타나 국민이 자기 욕망과 목표를 상당히 실현할 수 있도록 보장할 수도 있지요. 이것이 바로 소극적 자유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지만, 정작 우리가 원하는 것 자체를 누가 결정하는지에 대해서는 교려하지 않는거지요. 우리가 품게 되는 욕망은 철저하게 상업화된 시장과 대기업 자본에 의해 조장된 것일 수도 있고, 또 디스토피아 과학 소설에 등장하는 것처럼 놀라운 기술력에 의해 강제로 주입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이와 달리 적극적 자유는 무언가를 향한 자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통제하는지, 또 우리는 무엇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 깊이 성찰하는 거지요.

 그러나 누구도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호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사회와 공동체 안에서만 자기를 반성할 수 있고 자율성도 가질 수 있지요.

 따라서 우리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적극적 자유를 추구할 수 있게끔 길러줄 건강한 공동체를 가꾸고 돌볼 책임이지요. 이 문제는 자유와 책임이 서로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출발점으로 우리를 되돌려 놓습니다. 우리에게 자유가 없다면 의무를 실행할 책임도 없겠지요. 칸트의 말처럼 '해야 한다' 속에는 '할 수 있다'가 내포되어 있으니까요.

 

p219

 우리에게는 자유를 어떻게 정의하든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자유를 도구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는 그냥 좋은 것입니다. 그게 개인의 행복을 증진하거나 국가 경제에 득이 되지 않더라도 말이지요.

10. 내 삶의 노예가 되지 않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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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법을 배운 사람은 노예가 되는 법을 잊는다"

- 미셸 드 몽테뉴

 

p224

 우리가 유한한 시간을 산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경험과 행동은 비로소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무심한 우주에서 가치가 생겨날 수 있는 좁은 문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덕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사람이 영원불멸의 존재라면 용기나 인내, 자기희생 같은 덕은 굳이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존엄성이나 사랑, 용서 같은 것도 크게 의미가 없겠지요. 삶의 유한성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가치 있는 것을 찾을 수 있고 궁극적으로 삶 그 자체에도 매달리게 됩니다. 언제든 빼앗길 수 있는 것이기에, 역설적으로 굳게 지켜야 할 의미가 있는 거지요.

 요나스는 오로지 유한한 존재만 가치를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요컨데 '필멸성'이 '도덕성'의 전제 조건이 되는 거지요. 머독 역시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 모두 죽는다는 걸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덕이야말로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처럼 죽음은 그 자체로 덕은 아니지만, 다른 덕을 위한 의미 있는 관점을 탄생시키는 토대가 됩니다.

 

p226

 "철학은 본질적으로 죽음을 위한 준비다."

 

p227

 이게 죽음의 역설입니다. 죽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의미나 가치를 가질 수 없지만, 동시에 죽음 자체는 바로 그 의미와 가치를 위협합니다.

 

 '메멘토모리(memento mori)', 즉 '네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p232

 몽테뉴에게는 이것이 자유의 전제 조건이었습니다. 몽테뉴는 자신이 죽음에 매혹되었다고 말하며 사람들이 죽는 다양한 방식을 목록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하며 글을 끝맺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죽음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은 동시에 사는 법도 가르칠 것이다."

 

p234

 지금 당신에게 엄청나게 중요해 보이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지금까지 성취했고 성취하고 싶은 모든 것, 살아가며 맺어온 모든 관계, 일상적인 온갖 사건과 걸림돌과 걱정도 당신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이 짧은 삶을 왜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에 보내는가? 우리 존재는 밤에 날아다니는 반딧불이와 같다. 삶은 잠시 훅 타오르고 나면 사라진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큰 영감을 주는 생각이다. 당신은 바로 이곳에 매우 짧고 집약적으로 머문다. 그런데 왜 당신에게 주어진 삶을 최대한 이용하지 않는가?

 매닝은 형제를 잃은 경험을 이야기하며, 그 상실로 인해 살아 있는 시간을 더 귀하게 여기게 됐다고 말합니다. 그는 '메멘토 모리'라는 오래된 생각을 인용하지만 사실 그가 내린 결론은 고대 철학자들의 태도와는 정반대입니다. 매닝은 삶이 언제든 끝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행동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에게 코칭은 개인이 자기 꿈을 완전하게 실행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입니다.

 그의 웹사이트 글에 따르면 코칭은 우리의 발목을 잡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동기를 부여하고 성과를 개선하는 데 확신을 줍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철학적 삶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철학적 삶의 초점은 우리가 가진 꿈이나 욕망을 최대한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아니라, 그 꿈이 우리의 짧은 삶에 비추었을 때 과연 추구할 가치가 있는지 따져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코칭 자체를 완전히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메멘토 모리'에 대한 전형적인 이해가 '얼른 서둘러! 꿈을 찾으라고! 꿈을 막는 장애물은 치워버려!'라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런 메시지는 다시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서둘러 꿈을 찾으라는 태도는 마음의 평화와 성찰을 추구하는 철학과는 거리가 멉니다.

 아마 라이프 코치는 이렇게 초조하게 물을 것입니다. "대체 뭘 기다리는 거야?" 그러면 철학자는 이렇게 담담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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